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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까지는 못 되는 감상/기독교음악_ 앨범

「20121102, 어노인팅 10집 녹음집회」



이 후기는 지난 10월 23일에 있었던 어노인팅 10집 녹음 집회 참석 후기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 포스팅에 가깝습니다.



동의하기 어렵거나 불편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001 가치를 긁어모아 드리는 예배

갓피플’, 혹은 유투브에 접속한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예배사역팀이나 예배곡을 검색한다. 수많은 동영상 검색결과들이 모니터를 가득 채운다. 어디어디팀에서 부른 어떤 노래, 어느어느교회에서 부른 어떤 노래. 어떤 노래는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버전이 여러 가지고, 부르는 곳도 다양하다. 그런데 홍수에 마실 물 없다고, 어느 때보다 찬양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가시적인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마주할 수 있는데도 마음 한 편이 공허하다.

 

시선은 우리교회로 돌아온다. 공예배는 매일 같이 있고, 예배에 서게 되는 찬양팀도 여러 팀이 있다. 내가 섬기는 주일오전예배팀은 대부분이 주부임에도 수요예배 후에 모여 밤까지 연습하고, 청년예배팀은 주일 예배가 다 끝나고 연습한다. 하루의 끝자락에서 예배를 위해 모이는 것도 귀하지만 체력적으로 힘들고, 내일을 생각할 때 연습시간이 길어지면 초조해진다. 그리고 조금씩 시간을 아끼는 방법, 효율적인 연습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우리는 연습한다. 우리의 노래를, 우리의 연주를, 우리의 앙상블을.

 

우리의 현재는, 초점은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예배는 가치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제대로 드리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시간을 아끼고 열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잔머리만을 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식하고 우직한 예배의 경험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한 번의 예배를 위해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스물한 번째 노력이 여기 있다. 연습시간이 맞지 않아서 새벽까지 연습했다는 후문을 듣고 부러웠다. 그렇게 던질 수 있는 열정이 있는 것이 부러웠고 또 팀 전체가 그럴 수 있었다는 게 부러웠다. 지역교회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래서 예배 자체보다 한번의 예배를 위해 시간과 열정을 드리는 사전모임이 좋았던 것이다. 없는 시간 있는 시간을 다 긁어모아서 만들어가는 예배의 모습이. 그래서 나는 이 팀이 참 부러웠다. 그래서 어노인팅빠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우리 팀도 이런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가치를 모아서 뿜어내는 예배를 준비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에서였다.

 

감사하게도 참여하기 어려운 군복무 기간 동안은 녹음집회가 없었고, 심지어 전역하는 해에는 평소보다 일정이 늦춰지면서 10집 녹음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자는 신기하게도 9집이 끝나고 했던 예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002 팀 내에서 성장한 인도자와 팀의 견고함

다수의 경우에 예배인도자의 정체성이 팀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마커스의 다른 인도자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고, 인도자가 바뀌어도 찬미워십이 지금과 같은 정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디사이플스는 인도자의 개척으로 교체된 이후 많은 것들이 변했고, 오히려 뉴사운드처치가 예전 디사이플스의 정서를 담는 것을 보면 리더의 성향에 따라 팀의 성향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이는 한국에서 예배사역이 이렇게 본격화된 역사가 길지 않아 사역자의 사이클을 넘는 사역자체의 기간이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팀이 공동체로 서기 보다는 어느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어노인팅의 경우는 좀 다르다. 9장의 정규앨범의 인도자를 6명이나 배치하는 파격으로 위와 같은 상투성을 교묘하게 회피할 뿐만 아니라 지역교회를 섬기는 워십투어를 통해 새로운 멤버를 끊임없이 수혈하고 훈련시켰다. 워십투어로 참여한 사람은 어노인팅 모임과 예배에 멤버로 참여하면서 정규앨범 녹음집회나 컨퍼런스 예배의 멤버로 참여하게 되고, 그 과정을 겪은 멤버들이 새로운 인도자로 세워지고 있다.

 

이렇게 세워진 인도자들은 그동안 세워졌던 어노인팅의 인도자 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사역팀에서 세워지던 인도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예배사역팀들의 리더는 팀을 만든 사람이거나, 팀이 시작할 때부터 인도하는 사람, 혹은 팀과는 별개로 ccm 필드에서 찬양사역자로 사역하다가 예배인도자로 자연스럽게 활동영역을 옮긴 사역자들이다. , ‘팀의 이전부터’ ‘팀 밖에서사역하던 인도자들인 것이다.

 

이들과 달리 팀 안에서 성장한 인도자가 인도한다는 것은 그 결과가 어찌됐든 간에 어떤 한 사람의 부재나 궐위로 팀의 정체성이 휘둘리지 않는 어느 지점까지 팀이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인도자의 세대교체가 단순한 음악적인 스타일이나 정서 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팀의 성장을 담아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세대교체는 (익숙한 인도자들의 목소리를 앨범으로 어쩌면 더 못 듣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좋은 결과임에 틀림없다. 이번 10집은 지난 몇 년간의 컨퍼런스 앨범에서 이루어지던 차세대의 인도자의 훈련과정 완료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요건 사족

예배인도자가 기름부으심을 보장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당연한 전제 위에, 예배인도자의 영향력이 지금처럼 비대해 있는 것은 어쩌면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도하는 예배자로서의 탁월함이 팀의 운영을 원활히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 다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지만) 팀의 의사결정에 있어 리더의 의견이 절대적이라면 위험하다. 팀이 리더의 원하는 바를 구현해내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체로 부르셨지, 어느 한 사람을 절대적으로 돕는 조력자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다. 팀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성을 지녀야 하고 리더의 추종적 집단이 되어선 안 된다.

 

 


003 더 낮은 곳으로 불러~ 낮게 낮게~

여성 예배자들을 배려한 음역의 조정은 최근 예배사역팀들의 화두였던 것 같다. 나 역시도 주일오전예배 찬양을 인도할 때, 여 집사님들의 음역을 고려해서 연습 때 한번 불러보면서 키를 조정해서 찬송가 원곡에서 한 키에서 한 키 반 정도 낮춰서 부르는 식으로 곡을 구성하곤 한다.

 

찬송가가 보편적인 여성의 음역에 비해 조금 높게 설정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오랜 기간 찬송가를 불러온 우리네 교회가 여성 음역에 대한 고려도, 배려도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슬슬 여성의 음역에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쌍수 들어 환영한다. 하지만 과거에 자매가 예배의 고려 대상에서 소외되었다는 이유로 동시대의 형제들을 소외할 수는 없는 법. 양쪽을 모두 고려하고 배려하는 노력과 시도가 많이 필요하다.

 

남성과 여성을 모두 배려하려는 시도였을까, <우물가의 여인처럼><주 안에서 내 영혼 안전합니다> 같이 전체적인 음이 낮은 곡에서는 전조를 시도함으로써 그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했다. 개인적으로는 예배 내내 테너의 음역으로 찬양했는데, 화음으로 쌓을 줄 모르는 형제들은 낮다고 느꼈을 것 같다. <주 안에서 내 영혼 안전합니다>는 그 안전함을 표현할 때 너무 높은 음역이 부적절했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많이 낮았다.

 

 

 

004 가사의 미묘한 접점들, 인도자가 곡을 쓰며 그려가는 예배의 완결성

예전에 예배 곡을 구성할 때, 예배 전체의 틀은 그림, 그 틀 안에 들어가는 노래들을 물감이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었는데, (화가)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표현하고(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그에 해당하는 노래(물감)가 없어서 아쉬웠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자가 곡을 쓰고 그 곡으로 예배의 큰 틀을 생각하는 것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쓴 곡으로 예배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쓴 편지로 사랑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작곡을 할 능력이 없다면 기존에 있는 곡들에 자신의 어휘나 표현을 넣어서 노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노래들을 잇는데 같은 어휘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곡이 담고 있는 내용이 확장되는 경우도 있다. 9집의 경우, <기뻐하며 경배하세>죄와 슬픔 사라지고 근심 구름 걷히니하는 가사가 <예수님만을>죄와 유혹을 이길 힘은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라는 나눔을 거쳐 <The Bride>에서 주님의 사랑에 눈이 멀어 세상 모든 죄와 유혹 사라지네라는 고백으로 이어지면서 천차만별의 장르와 메시지를 담은 일련의 곡들이 신부된 교회,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모습이라는 완성도 높은 주제의 예배곡 묶음으로 탈바꿈 한다. (원래 9집에서 계획되어 있던 <정결>이 있었다면 그 죄를 소멸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고백으로도 확장됐을 것이다.)

 

이번 앨범에서도 작게는 <복이라>에서 고백했던 주님과 함께 걷는 복에 대한 이야기가 <주의 길로 달려가리라>에서 다시 환기되는 자그마한 연결구조와 크게는 열방의 주인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해 노래함과 동시에 나를 안전하게 하시는 선하신 목자의 이미지를 겹쳐서 배치하는 구조를 만들어지며, 이어서 주의 계명의 길로, 주와 함께 주를 위해 주를 향해 달려간다는 고백은 주 얼굴로, 주의 사랑으로 달려가는 것임을 고백하는 연결로 이어진다. 9집에 비하면 조금은 희미한 편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개인적으로는 여는 예배에서 나눴던 하나님의 얼굴에 관한 이야기와 연결되어서 주 얼굴 향하여 달려간다는 고백으로 강하게 연결되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이런 예배의 큰 그림을 만드는 데에 인도자의 작곡능력은 빛을 발한다. 곡을 쓰지 않더라도 곡과 곡을 잇는 연결고리를 잘 찾는 것도 (지나치게 기능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필요하다 생각된다.

 

 

 

005 한계와 제한 없는 예배

그런 얼개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 인도자의 리딩이라고 생각한다. 곡과 곡의 흐름을 단순한 노래의 연속으로 만들지 않고, 예배자들이 계속해서 흐름을 따라 예배할 수 있게 돕는 것. 다음 곡의 가사나 제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그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혹은 자신의 경험이나 경구, 책의 구절 등을 이야기함으로써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이 노래를 우리가 왜 부르는지에 대해 인식하게 하는 것. 예배자들이 수동적으로 다음 노래의 전주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음 고백을 하기 위해 안달이 나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돕는 역할이 인도자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중반까지의 흐름에서는 인도자의 리딩이 너무 적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도자가 지나치게 말이 많아지면 회중들의 집중이 깨지고 지루해진다는 얘기는 무수히 많이 하지만, 이미 예배자들의 마음이 많이 열려서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는데 멍석을 깔아주셨어도 괜찮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목요예배 때는 이런저런 얘기가 많아서 더 좋았었는데 녹음집회 때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한정된 시간 때문에, 혹은 예배의 흐름과 구성상 후반부에 나눌 이야기들이 많아서 절제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곡과 곡 사이에 계속해서 집중하며 예배했던 기억이 예전부터 계속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시간이 좀 짧지 않았었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006 두 뺨 가득히 뜨끈뜨끈한 눈물을 철철 흘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예배가 끝나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본 이야기들이고, 그런 것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예배할 때는 참 좋았다. 예전에 비해 흔들리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믿음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열정을 쏟고, 시간의 제약이나 주변 환경의 제한으로 완전히 집중하고 예배하는 것이 많이 잦아들었는데, 이 날의 예배는 마음이 열리고 오롯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던 예배였다. 우리교회에서 예배할 때는 내가 이렇게 반응하면 누군가가 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식의 무의미한 자문을 스스로 많이 던져서 위축됐는데, 대형집회를 참석하게 되면 그런 부분에서 많이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교회의 공동체성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정말. 예배할 때는 벅차오르고 울컥하고 말도 아니었다.

 

 

 

007 예배, 곡에 대한 이야기들

 

-00 여는 예배 (인도 : 강명식)

사실 <온 맘 다해>는 정말 많이 들었던 5집의 수록곡이고, 강명식 음악사님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참석할 때마다 들었던 하나님의 얼굴과 손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었다. 조카들이 삼촌은 안 반기고 손부터 찾았다는 일화도 몇 번 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새롭다.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대하는 내 마음이 새롭다. 내 상황과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매번 예배를 하면서 손이 아닌 얼굴을 구하겠다고 기도하고 결단하는데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내 재정적인 문제나 환경, 진로와 고민거리들만 나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을 등지고 내 할 일을 하면서 무심하게 하나님의 공급을 어깨너머로 넘겨받던 내가 돌아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다짐은 계속해서 예배 내내 상기되었다.

 

You faithfully supply all my needs according to Your plan

So help me, Lord, to seek Your face before I seek Your Hand

and trust You know what's best for me when I don't understand

then follow in obedience in every circumstance

 

 

-01 복이라 (김수형 사, 김민영 곡)

여는 예배 이후에 별다른 코멘트 없이 바로 이어졌다. ‘축복이라는 말은 복을 빈다는 의미로서, 조금 잘못 쓰이는 가사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2절의 행복과 대구를 이루는 것을 노린 것 같아서 좋았다.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9집을 제외한 그동안의 앨범이 꾸준히 그래왔듯이 의도적으로 소박한 도입은 이번 앨범에서도 유효하다. 개인적으로는 여는 예배의 마지막 기도가 시작될 때 밴드가 바뀌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그랬는지, 회중들이 어느 순간이 되자마자 기도를 정리하고(!) 첫 곡의 시작을 기다리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계속해서 기도할 것은~’ 하면서 계속 기도하는 건 어땠을지…….

 

 

-02 놀라운 자비의 구주 Wonderful Merciful Savior (Dawn Rogers , Eric Wyse )

우리는 많은 노래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노래하지만, 의외로 잘 노래하지 못하는 주제들이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노래도 그 중 하나인데, 삼위일체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에 가까운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 교회는 거의 노래하지 못하고 있고, 사실 그에 관한 노래도 손에 꼽을 정도다. 이는 본디 삼위일체의 교리가 보통의 크리스천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개념인데다가 예배곡으로 표현되는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 ‘성령 하나님의 위로 혹은 능력과 같은 지엽적인 주제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하나님 한 분만>이나 이 노래와 같이 간단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묶어서 노래할 수 있는 노래가 많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원곡의 ‘You are the One that we praise, You are the One that we adore’하는 가사가 한분이신 하나님으로 번역되어서 오히려 그런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더 강조된 것 같아서 좋았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을 명확히 하는 것, 또 예배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돕는 것이 예배사역자의 역할이 아닐까.

 

 

-03 알레 알렐루야 Alle (Josh Davis , )

-04 주를 경배 (안정환 사, )

녹음집회 전에 <알레 알렐루야>가 외국곡이라는 것을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 유투브느님(!)의 힘을 빌려 여러 나라의 언어로 노래하는 원곡 영상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역시나 만국의 공용어라는 소개와 함께 시작하는 곡. 예전에 2007 컨퍼런스 리뷰에서 <영원한 생명의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언급했지만 할렐루야라는 말이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반복을 많이 해서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음악적인 부분에만 함몰될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 가사가 확장성이 없기 때문에 의미 없이 지루해질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하는 추임새(?)는 꽤나 즐거웠다.

 

<주를 경배>는 처음 들었을 때 <알레 알렐루야>의 또 다른 브릿지인 줄 알았을 정도로 위화감 없이 잘 섞여서 이어졌다. 6집의 <예수 감사하리 주의 보혈> - <광대하신 주>의 콤보처럼 느껴졌다.

 

 

-05 주님 내게 선하신 분 So Good To Me (Darrell Evans & Matt Jones , )

사실 이 곡의 배치는 정말 애매했다. 가사의 확장성이 딱히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고조라고 보기도 어려울 만큼 튀는 느낌이 강했다. 곡 자체가 담고 있는 가사라든가 흥겨움은 있지만 앞뒤곡과의 배치가 어색했다고 할까. 대개의 예배앨범이 장르적으로 백화점식 구성이라서 들어가게 되는 곡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예배캠프 앨범의 <해피송>에서 느꼈던 장르적 생경함을 느꼈다. 원래 리듬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로 바꿔서 원래 알고 있던 리듬이 뭉개지는 느낌. (이 곡은 왜 이리 혹평이지...) 하지만 정작 예배할 때는 기쁘게 불렀다. 그것이 아이러니.

 

-06 난 노래해 (전은주 사, )

목요예배를 참석했을 때 처음 들었던 곡. 왜 그랬을까. 데이빗 크라우더 밴드의 <O Praise Him>의 느낌이 많이 났던 것 같다. 창조주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동시에 성육신 임마누엘 하나님의 그림을 같이 그리는 것은 참 감격적이다. 구속의 역사를 더 극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인데, 그래서 나는 이 곡을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십자가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후주 때 어색하게 점점 작아지면서 8마디 정도가 이어졌던 기억이 난다. 의도 된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눈치를 봤던 것 같다. 목요예배 때에는 다 노래해로 가사를 바꿔 불렀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이 참 좋다.

 

 

-07 주님 발 앞에서 (전은주 사, )

음악을 예배의 도구로 활용하는 형태에서 음악적으로 단순한 노래가 더 깊은 예배를 돕는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연주하는 사람들도 화려한 코드와 리듬으로 만들어져 있는 노래보다 간단한 코드로 연결되어 있는 곡에서 깊이 예배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어쩌면 음악이 우리 예배를 방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든다. 같은 맥락에서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기독교의 지적처럼 음악을 도구로 이용하지만 도리어 음악에 취하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할 지점이 여기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간에 가장 깊이 기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것, 주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씀과 계명의 길이라는 해답을 이미 후반부에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곡을 통해 기도하면서 그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갈망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마음을 모두 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지향하는 예배의 태도는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아닐까.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율법으로 우리의 죄를 확인한 후에야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제적으로 경험되는 것처럼,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우리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 인식이 있어야 그 뜻을 알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하며 죄에 함몰된 우리의 불협화음을 발견한 후에 예수의 보혈로 해결되는 7집의 구성 - <하나님 그 임재 앞에>-<예수 피밖에> - 처럼 말이다.

 

 

-08 우물가의 여인처럼 Fill My Cup LORD (Richard Blanchrd , )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자구행위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찾는 진리와 도는 사실 헛된 것들에 불과하다. 우물가의 여인으로 대표되는 우리는 무너져가는 자신의 삶을 위해서 무언가 찾고 자신을 채우려고 한다. 다섯 번이나 결혼했던 그 여인은 그녀가 원하는 가치를 적용해 진짜를 찾았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진리라는 것이 전적으로 내게 달린 것이 아니다라는 자각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방법을 몰랐을 뿐, 예배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인 (흔히 상한 심령이라 부르는) 낮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하나님께 채워줄 것을 간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해답,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하늘양식을 부어주시는 분께로의 시선의 전환을 불러오기 때문에, 늘 실패라고 느껴지는 우리의 믿음과 사역이 패배가 아니고, 소중한 출발이다.

 

 

-09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전은주 사, )

컨퍼런스 2007 앨범의 <성령이 오셨네>에 대해 코멘트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유로 코멘트하지 않겠다.

 

 

-10 모든 것 아시는 주님 (전은주 사, )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겸손하신 사랑에 대해서 함께 노래했던 <난 노래해>의 선포는 개인의 고백으로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구체화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온 우주적 선포를 하다보면 내 개인의 삶의 문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문제로 축소되고 (사실 축소라기보다는 지나치게 크게 보았던 것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맡기기만 하면 되는 해결책이 제시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내 문제를 모르실 일 없고, 모든 것 창조하신 분이 내 문제를 해결 못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합력한다는 표현은 흡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모든 일이 척척 만사형통된다는 의미로 오역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모든 일에 하나님이 좋은 것 - 물론 좋은 것은 하나님 당신의 선함과 뜻 - 을 위해 일하신다는 가사는 참 좋다.

 

 

-11 그 사랑 감사해 Thank You For Loving Me (Tommy Walker , )

영어 영상으로 노래를 익혀서 그런지 번역된 가사가 입에 잘 안 붙고 엑센트가 다른 곳에서 붙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좀 어색했다. ‘O God, thank You for loving me’주님 그 사랑 감사해로 밖에 번역할 수 없는 음절의 한계, 그리고 언어적 차이가 느껴진다. 2인칭의 고백을 3인칭으로 바꿀 수 없는 언어의 한계랄까. 그런 면에서 <Here I am again>의 후렴 번역은 얼마나 잘된 번역인지. 하지만 번역곡을 처음 부를 때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verse에서 '사랑'의 모습에 대해서 고백한 후에 그 사랑 감사해로 가사를 확인하는 구조가 너무 좋았다. 이런 곡이라면 후렴을 몇 번씩 반복해 불러도 좋다. 앞에서 고백한 사랑이 머릿속에서 자꾸 환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 중에는 무의미한 가사의 후렴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면에서 타미워커는 참 본받을만한 작곡자다.

 

 

-12 주의 길로 달려가리라 (전은주 사, )

-13 주 말씀 향하여 I Will Run To You (Darlene Zschech , )

요즘 많이 하게 되는 생각은 (우리 청년부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많은 청년들이 말씀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쉬운 길임은 물론이거니와 유일한 소망인데, 세상에서도 들을 수 있는 심리학이나 경제학으로 점철된 이야기, 자기개발서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들을 주워섬기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기술들 말이다.)

 

심지어 예배를 돕는 사역을 한다는 청년들도 말씀을 보기보다는 각종 기독교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음악적 기술들에 천착하고 앨범에서 자신이 써먹을무언가를 탐색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정도로 우리 예배에 말씀이 서 있는 자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찬양할 때 신나게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잠들어버리거나,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단 한 번도 펼쳐보지 않는 모습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으랴.

 

이런 측면에서 말씀과 계명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 곡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참 귀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많은 노래로, 음악으로, 또 여러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가야할 길은 주의 계명의 길이며, 말씀이 가리키는 단 하나의 길이라는 고백이 우리 안에 많이 불리기를 소망한다.

 

영광에서 영광으로라는 가사는 많은 노래에서 쓰이는 고린도후서의 표현이고, 많이 부르게 되는 가사지만 전달되는 의미가 불분명해서 영어성경을 찾아보았다. NIV의 표현은 ‘with ever-increasing glory.’ 하나님의 얼굴로 달려간다는 말은 말씀을 통해 비추시는 영광을 보며 점점 커져가는 영광으로 이 길을 걷는다는 의미라는 생각을 해본다. 두 곡의 연결로 318절 자체를 노래하게 되는 셈이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4 교회여 일어나라 (전은주 사, )

몇 년째 같은 얘기를 써오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교회를 향한 지탄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불거진 기성세대 크리스천들의 과오는 그대로 교회 전체를 향한 비난으로 확대되었고, 청년들에게 세상의 비난과 멸시는 어쩌면 조금은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자신의 교회에 느끼는 답답함이 분명히 있지만 사실 나도 교회의 이런 부분은 답답해라고 말하기 어려운, ‘아버지가 부끄러운 행동을 하긴 했지만 자식 된 도리로 그 치부를 차마 드러낼 수는 없는그런 어중간한 입장에 우리 젊은이들은 서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거센, 기독교를 향한 분노의 불길에 지레 겁을 먹은 젊은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숨긴 채 ,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에 천착하며 세상과의 접촉을 피한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다. 시대가 이렇게 암울한데 과연 우리가 예배만 하고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함께 모여 노래하고 예배하는 것 중요하고 좋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문제가, 교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하는 부끄러운 염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고민 위에 선포되는 일어나라는 재촉은 후렴에서 보다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사실 - 우리가 노래해야할 대상 - 을 선포함으로써 과연 이렇게만 해서 회복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을 무력화시킨다. 후렴의 선포는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예배할 때의 지향점을 명확히 드러냄으로써 문제의 해결책으로서의 예배의 성질, 그 당위를 확보한다. 오히려 건강한 예배는 역설적으로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릴 부르신 삶의 자리에서도 계속 되는 것이기에, 우리의 고민과 문제는 한 마디의 질문으로 우리에게 던져진다.

  

어떻게 삶에서 예배할 것인가.”

 

6/8의 박자, 후렴의 익숙한 코드 하행진행은 상승하는 멜로디와 어우러져, 강력하게 선포되는 메시지에 힘을 보탠다. 9집에서 들을 수 있었던 비슷한 스타일의 <곧 오시네>와 같은 화려한 화성이나 강렬한 비트가 따로 없었음에도 이 후렴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은 승리해야 마땅한 교회의 패배에 좌절하는 크리스천의 회복의 열망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새 사람><곧 오시네>의 곡을 빌린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목요예배 때에도 이미 선포한 적이 있었던 주기도문의 선포는 감격적이었다. 교회의 정체성을 담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떼선포(;)’는 선포하는 이가 교회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함께 예배하는 예배자들과의 동질성, 더 나아가 공동체성을 느끼게 한다. 회중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선포하고 노래하는 예배의 모습, 쉽게 간과하지만 가장 중요한 회중예배의 지점이 아닐까. 그건 그렇고 나는 어떻게 일어나라~’하고 바로 전조되는 진행을 알고 있던 것처럼 불렀던 걸까.

 

노래가 끝나고 개인과 교회를 위한 기도가 이어졌다. 항상 이런 집회나 수련회를 참석해 기도하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전부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문제는 삶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대형집회에 가둬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으로 초청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삶으로 예배하는 출발점이 되리라.

 

(예배의 흐름에 대한 얘기와는 별개로 어떤 생각이 들었는데, 후렴의 멜로디라인은 강명식 음악사님의 목소리로 덧입혀져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라이브 당시 인도자와 싱어의 밴딩은 반의 반박을 반음 정도 걸쳐 부르는 그분의 밴딩과 매우 흡사했고. 음악사님의 최근 주요 레퍼토리인 신부된 교회의 메시지를 생각해보면 자주 불리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15 우릴 부르신 아버지 (강명식 사, )

교회에서 축복의 노래로 부르면 좋을 것 같다. 녹음집회때는 사실 다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를 보면서 부르는 것이 민망해서 쉽게 그렇게 못하는데, 처음 본 사람에게 손을 뻗고 막연하게 축복한다고 하는 것이 가식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물론 그런 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지역교회에서 부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부르고 난 다음에 함께 갔던 준이 형이 비취사는 수동형이 아니냐며 비추사가 맞지 않느냐는 얘기를 하길래 집에 돌아와서 찾아보니 개역개정에서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개역한글에서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로 번역되어 있다. 찾아보니 더 헷갈린다. 뭐가 맞는 건지.

 

 

 

008 삶으로 돌아와서

군에 있으면서 대형집회나 유명집회를 쫓아다니는 것이 하나님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적인 요소에 의존하고 있는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곳을 열심히 다녀봐야 채워지는 것, 채워진다고 느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뿐이었고, 교회로 돌아오면 똑같은 모습이었다. 교회의 공동체 안에는 들어가기 싫어하면서 기도원에만 주구장창 갇혀 있는 그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예배를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는 데에 열심을 다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전역도 하기도 전에 이미 청년찬양팀에 복귀하고 주일오전예배도 섬기게 된 것도 벌써 넉 달 째에 접어들었다. 다시 모교회로 돌아오면서 마음먹었던 것들 대부분은 잘 되어가고 있고, 어려움을 겪었던 것들, 사역 자체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일을 그르치는 바보짓이 많이 줄어들기도 했다고 스스로는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런 부분에 절제하고 자제하다보니까 내 안에 열정이 많이 사그라진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분명 예전보다 더 안정적인 것도 분명하고, 기분에 따라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는 굳은 마음으로 사역하지만, 예전과 같이 폭발적인 기쁨이나 즐거움이 많이 사그라진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말이다. 마음이 지쳐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열정을 활활 태우면서도 안정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 내게는 많이 어렵다. 내 자아가 커지지 않으면서도 사역을 기쁨으로 하는 것이 어렵다. 또 교회보다 교회 밖의 다른 어떤 곳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내게 주어진 것들을 자유하게 누리는 것이 어렵다. 내게는 청년부가 참 많이 소중한데, 그 공동체 밖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진정한 예배의 마음을 찾게 되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찾게 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그렇다. 교회 사역에 치여서 한숨짓고, 교회 밖의 어떤 것, 학교의 동아리든, 어노인팅과 마커스, 예전단에 가서 회복을 찾고, 교회로 돌아와서 그걸 땔감삼아 근근히 버티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가슴 아프다. 모든 것 아시는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도 계시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우리네 모습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래서 이번 녹음집회가 단순한 예배로, 녹음집회로 느껴지지 않는다. 커다란 숙제로 내게 던져진다. 유명세와 규모, 화려한 무언가가 아닌, 예배의 마음 자체로 예배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 개개의 공동체 안에서 과연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 난 어노인팅이 없어도 지금처럼 예배할 수 있을까. 아니, 꼭 노래하지 않아도 예배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해서 애석하다.


우리는 잘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