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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까지는 못 되는 감상/기독교음악_ 앨범

「20141016, 어노인팅 11집 녹음집회」

주의!

이 포스트는 어노인팅의 열한번째 녹음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이 훨씬 더 많이 담겨 있습니다. 








예배와 나

     사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침체를 겪었다. 아니, 아직 그 침체를 과거형으로 말하기 아직 이른 건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예배사역이라고 하는 일련의 사역방식에 본격적으로 관심 가진 것이 스무 살 때였으니, 이제 딱 10년 됐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교회 안에서 사실상 예전적 예배만을 경험했고 '준비찬양'만 10~15분 하는 것에 익숙해있던 나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설교자에게 발언권이 독점되어 있지 않고(이제는 인도자들이 독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예배자들이 설교말씀을 듣는 수동적 태도가 아닌 직접 노래하는 적극적 예배를 굉장한 감격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리고 나는 더 나은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이 예배의 형식을 연구하고 파고들었다. 워크샵에 참석했고, 앨범을 외우듯이 들었고, 집회를 쫓아다녔고, 더 나은 인도자가 되기 위해 팀을 조직하고 리더로 섰고 기타도 연습했다. 그리고 작곡도 시작했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성경과 책들을 읽어나갔다.


     어찌됐든 지금이 스무 살 그때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인 것에는 틀림없는데, 어느 순간 파고들면 들수록 기술이 늘고 음악은 늘어도 공허한 느낌이 들더라. 눈물 철철 흘리고 온 몸을 바짝 땅에 붙이며 경배한 예배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도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공허함의 정체를 짐작하기 시작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것을 파고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아무런 맥락 없이 일단 환호하며 박수를 쳐야만 찬양을 시작하는 모습, 논리적 오류나 신학적인 오류 투성이인 멘트가 적당히 고조된 어투와 적당히 은혜로운 몇 단어로 마구잡이로 선포되는 모습, 전혀 다른 처지들의 교회가 한 노래를 모두 똑같은 스타일과 똑같은 연주, 똑같은 방식으로 찬양하는 모습들을 발견하면서부터 내 문제의식은 강해졌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예배한다고 하는 모든 행동은 사실은 그냥 쿨한 예배의 문화만을 스스로에게 이식한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의식.  또 예배하는 공동체에 대한 문제도 여전했다. 대형집회에 수천명이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고 열띄게 노래하지만 마치 콘서트에 참석한 사람들처럼 흩어져버려 각자의 교회와 삶을 돌아가면 막상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예배에 대한 문제 말이다.


     이런 문제의식에 무게를 더한 것은 세월호로 도드라진 크리스천들의 태도였다. 예배당에 울리는 거룩한 찬양소리와는 달리 삶의 문제에서 정작 나서야 할 부분에서 나서지 않는 우리가 종교의식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거룩한 척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예배, 특히 음악을 매개로 한 예배에 있어 거룩한 척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모든 장치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삶은 변하지 않는데, 거룩한 목소리만 내서 무엇하냐”는 생각 때문에. 


     사실 이 문제는 내 안에서 여전히 진행중이고, 집회가 끝난 지금도 노래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함께 부르는 것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다. 핸드폰 녹음어플에는 쓰다만 미완성곡들이 잠들어있지만, 마저 이어서 만들고 부를 엄두가 나지 않고, 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막막하다.


     어노인팅 11집 녹음집회와 그 준비과정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 완벽한 해답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예배자들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가 하는 풀이과정 몇 줄을 슬쩍 훔쳐본 느낌, 그런 느낌을 받은 3주였다.




11번째 화두, 관계와 공동체

     11집의 주제와 목표는 사실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다. “성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과, 우리의 공동체성”이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삶의 무게’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를 ‘어제 같은 슬픔’을 딛고 찬양할 수 있게 한다는 고백은, 문제에만 천착해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고민한 티가 엄청 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더 높은 차원을 향한 깊은 고민, 또 그 고민을 주고받는 공동체의 소통은 예배가 자칫 문제를 등지고 정신승리하며 썩어버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예배 선곡과 그 흐름마다 배치되어 있는 부분 어디 한 곳이 소홀해 보이는 곳이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박음질되었다. 노래마다 철저하게 조응하는 가사들이 이 고민의 과정을 반증한다.


     그 덕분에 곡수(17곡, 후렴포함 18곡)가 많아져  깊게 몇 분씩 기도하는 시간이 없었는데도 러닝타임이 유래 없이 길어지기도 했고, 노래 사이사이를 잇는 인도자들의 멘트가 여유 없이 느껴져 숨 가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공동체를 노래하는 예배에 있어서 인도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 네 사람이라는 것 – 은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네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처럼 예배인도자에게도 그에 준하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고, 선곡부터 편곡, 독점적인 발언권인 멘트까지도 인도자의 성향에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매우 큰데, 그 인도자가 다수라는 것은 그 권한이 어느 한 사람의 독단에 휘둘리지 않는 중립지대에 놓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네 사람의 연대는 단순한 노래파트를 나누거나 멘트의 순서를 정하는 것 이상의 실질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연습 후에 페이스북에도 썼지만 ‘한국인 리더의 멘트를 꼼꼼하게 영어로 통역해주는 배려’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


     이 공동체의 의미는 사실 성삼위일체와 그로부터 시작된 오랜 교회의 역사에서 발견된 것이다. 끊임없이 강조되는 삼위일체, 아버지와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그 연합의 다음 순서가 우리들 자신임을 확인시켜 주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교회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문제가 우리 시대, 우리 땅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우리가 문제를 딛고 일어나 연합할 것을 재촉한다. 앨범 자켓 사진이 될 포스터 역시 그런 주제를 상징한다. (처음 볼 땐 오륜기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원이 세 개,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의미도, 디자인도 높은 수준이었던 6집의 자켓에 비해 조금 디자인에 비해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콰이어모임은 녹음 당일보다 더 좋았다. 늘 그랬다.



콰이어 모임, 사전준비과정

     콰이어 모임의 가장 큰 장점은 예배의 큰 흐름을 같이 그릴 수 있다는 것(이미 그려져 있는 걸 다른 사람들보다 아주 조금 먼저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이다. 이미 완성된 편곡의 완성된 노래를 따라 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서 음악적 화려함에 현혹(?)당할 가능성이 줄어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고민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이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다른 사역팀이 완성된 편곡으로 회중을 설득하는 것과 달리 어노인팅은 (제한적이지만) 중간의 엉성한 과정을 의도적으로 노출해 콰이어들이 참여할 여지를 남긴다. (실제로 콰이어들이 참여하는 부분은 거의 없지만, 팀 외부인사가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는 것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리라.)


     문제는 (늘 그랬지만) 이미 세 번의 모임으로 예배의 큰 그림을 그린 콰이어들에 비해, 당일 참석한 사람들과 앨범을 듣는 사람들의 이해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마 개인적으로 늘 참석했던 정규앨범에 비해 참석한 적이 없는 예배캠프 앨범에 대한 감동이 덜 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나 싶다.) 이전의  앨범보다 이번 11집에서 주제의식을 노래 자체로 꼼꼼히 세세하게 풀어내려는 시도를 했음에도, 음악이 담긴 앨범의 매체 특성상 메시지의 깊이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 분명한 한계를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런 부족한 소통을 보완하기 위해 게시판이나 페이스북을 통해 예배를 앞둔 어노인팅의 생각이나 기도의 내용들을 많이 나누려는 시도가 있긴 했지만 (예배에 참석하고 “어노인팅 짱이에요! 은혜 많이 받았어요!”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지향을 두고 있는 사람들, 예배를 스스로 풀어내야하는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소통이나 시도가 분명 필요하다. 대부분은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적극적인 소통의 과정이 열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5층에서 가진 마지막 모임 때 하셨던 실장님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주제를 받치는 공동체의 흔적은 네명의 인도자 집단(;)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사역의 인적 구성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안내자, 인도자, 담당자가 새로 세워지는 모습 속에서, 사역의 범위를 '예배를 가르치는 사역'에서 '함께 예배하는 사역'까지로 확장함으로써 단련된 구조의 탄탄함이 느껴졌다. (쓰지 않던 근육을 쓰려니 운동을 하게 되더라, 하는 비유가 적절할지...) 2000년대의 어노인팅에게 받았던, 심하게 수고하는 몇몇 인물에 의해 유지되는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앨범과 예배의 주제로 삼았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팀 내에서 어느 정도 완성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어쩌면 공동체를 세우려는 노력의  결과로 공동체를 노래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쉬웠던 것은 긴 러닝타임 때문이었을까, 인도자들이 전체적으로 서두르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는 것.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노래배우기에 비해 인도자들이 쫓기는 듯한 느낌은 분명히 있었다. (나중에 Loue가 어떤 뜻이냐고 되물은 사람이 있었던 걸 보면) 글로벌 메들리를 배울 때 각 노래의 가사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이 완전히 되지 않았던 것 같고, <영원한 사귐으로>도 콰이어 모임에 차근차근 설명했던 것에 비해 설명이 되다 말고 노래가 시작된 느낌이었다. (정확한 표현은 생각나지 않지만 ‘우주의 중심에는 관계가 있고 하나님이 그 관계에 우리를 초대하셨다’는 연습 첫 날 김재우 선교사님의 설명이 개인적으로 노래를 이해하는 데에 크게 도움 됐는데 그 얘기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곡 자체가 워낙에 좋아 별 다른 설명이 굳이 필요 없어 보이긴 했지만.)




단편적인 당일의 기억 몇가지

○... 콰이어 석 저 멀리 오른쪽 앞에서 가사를 보면서 수화로 찬양하던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 눈에 밟혔다.


○... 어노인팅 공홈 게시판의 자주 올라오는 질문 중 하나인 모션 백그라운드, 이번 집회에서도 유독 예쁜 모션들이 많이 쓰였는데, 질문글이 게시판에 또 올라오지 않을까 싶다.


○... 엄청난 촬영장비가 눈에 띄었다. 두 대의 지미집과 스테디캠, 숄더마운트, 레일슬라이드가 모두 동원되는 걸 보면서 조금 있으면 헬리캠도 뜨겠다는 망상 잠깐.


○... 드레스 리허설 때 콰이어석에 소리가 하나도 안 들어와서 끝나고 얘기해야하나 생각했는데, 리허설 중에 어느 순간 설치하고 계시는 기사님들 덜덜덜


○... 지난 10집 때도 그랬지만, 전체적으로 노래 음역이 많이 낮아서 끝나고 나니 목이 다 쉬었다. 전체적으로 주변에서 부르는 형제들의 생목소리 – 아주 낮은 음을 부를 때 나는 - 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 <주께서 다스리네>나 <비전>, <Loue, Loue> 할 때 중간 중간 자막이 틀린 부분이 좀 있어 아쉬었음, 흠흠





노래들과 생각

01 손잡고 함께 가세 (전은주 사, 곡)

     왜인지 행진하며 불러야 할 것 같은 드럼 비트에 얹어진 이 노래는 엄밀히 말하면 예배곡은 아니다. 그러나 11집의 모든 노래를 한곡으로 축약해야 한다면 단연코 이 곡으로 수렴할 것이다. 즉, 이 곡은 앨범(집회) 머리부터 주제를 이야기하고 시작하는 강력한 두괄식 선언인 것이다. <더불어 함께>를 생각나게 하는 ‘수천 년 동안 온 땅 곳곳에서’라는 가사는 우리가 속해있는 ‘교회’가 어느 한 시대, 한 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면서 멈춘 적 없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 이 선언은 우리에게 지금의 문제 – 그것이 관계의 문제든, 그 외의 문제이든 간에 - 에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않을 것을 에둘러 채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야만 해”하면서 가르치려 하지 않고 권유한다. 당위와 사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자’며 가볍게 손을 내미는 이 태도가 어노인팅의 장점, 그리고 인도자로서 전은주 전도사님의 탁월함이 아닐까.


     노래가 시작하기 전에 ‘요리하다가 손이 베여 피가 난다고 손가락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효율적인 설명이 되었겠지만, 사실 이 비유에 있어서 ‘저 손가락 잘라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옆에 있는 손가락, 혹은 발가락이라는 사실. 흠흠. 모든 손가락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는 “머리”를 본받는 것은 발가락의 또 다른 숙제이겠다.



02 우리 모여 노래하며 (최요한 사, 곡)

     무엇보다 곡이 참 좋다. 처음 들었을 때는 후렴 이후에 나오는 코드진행 - 나는 이런 코드진행을 변태코드라고 한다. - 이 맘에 들어서 슬쩍 적어가기도 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를 들을 때도 느꼈지만 최요한 간사님의 곡은 멜로디와 진행이 세련되면서도 아련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좋다. 악기 편곡도 제일 좋았고. 그런데 곱씹어보니까 가사에도 많은 고민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곡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어떤 의도로 들어간 가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제 같은 슬픔’이라는 표현에 유독 울컥했다가, 집회 중에야 전체적인 의미를 생각해보게 됐다.


1) 어제 같은 슬픔을 우리는 겪었다.

2) 그래서 우리는 기쁨과 소망 잃어버리고 노래할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됐다.

3)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부른다.

4)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한 선하심을 믿는다면 그래도 감사하고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5) 그렇기에 그 하나님과 만나는 그날이 오는 것을 기대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20일 주일에 ‘이제 그만 슬퍼하고 찬양합시다’ 혹은 ‘슬퍼하기보다 찬양합시다’라고 아무런 고민도 없이 기계적으로 회중들을 가르치려 들었던 정신승리들에 내가 분노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우리가 충분히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않았기 때문일까. 지금은 충분히 그런 시간이 흘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이 더 되새김질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편함. 이 곡은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애잔한 마음에 복잡한 순간을 겪다가, 결국 “기뻐해”라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최소한의 심정적 여유를 안겨주었다. (이것 또한 정신승리는 아닐까, 하는 마음 속 불편함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03 주의 사랑 우리 안에 (전은주 사, 곡)

     “어노인팅의 히든트랙 같은 8집(;)에 수록되었던 <열방 향한 주의 열정>의 응원곡 버전이라는 설명에 걸맞게 신난다. 트렌디한 신디사이저 소리도 곧잘 어울려서 좋았다. 요즘 일렉트로니카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유독 예배예술에서는 도입이 늦다. 아무래도 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리라. 기성세대들이 지금의 예배음악을 경박한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나도 나중에 메탈이나 디제잉하는 음악들이 예배음악으로 쓰일 때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누군가의 반문이 귀에 남는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방방 뛰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있는 곳은 자리가 너무 좁고 허리도 아파서 그냥 움찔움찔하기만 했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의 리듬은 계속 신경 쓰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으로 부르기로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모두 ‘지금 여기-에 계시는’으로 부르고 있어서 혼자 끙끙. 



04 가장 높은 그 이름 No Other Name (Freddy Rodriguez, Douglas ․ Laurie Engquist 사, 곡)

     높다. 엄청 높다. 이 노래는 음역으로도 그렇고 가사로 봐도 그렇고 이 앨범의 선곡들 중에서 제일 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스라엘 허튼의 노래들과 비슷한 구조, 비슷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남자든 여자든 일반적인 음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따라 부르기 굉장히 애매한 음역에서 진행된다. 차라리 키를 낮추는 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면 E키 개방현을 못쓰니까 안되려나...) 허튼 식 노래의 브릿지에서 원래 후렴으로 다시 돌아갈 때 애매해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섹션으로 확실하게 장치해놓은 것이 눈에 띈다.


     원곡의 후렴은 NO OTHER NAME 하는 같은 구절에 수식어 (that's higher / that is stronger / forever / can heal us / can free us / so precious)가 붙어서 상대적으로 기억하기 쉬운 반면에, 한글 가사는 수식어부터 기억해야 했기 때문에 꽤나 헷갈렸다. (게다가 처음 세 번은 ‘주’ 이름, 나중 세 번은 ‘그’ 이름이라서 그 부분도 헷갈렸고.) 



05 영원한 사귐으로 (최요한 사, 곡)

     가사가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요한 간사님이 작곡 레슨을 받으면서 ‘사랑을 얘기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노래’를 쓴다거나 하는 작업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일까, 삼위일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삼위일체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흐름이 너무 자연스럽게 담겨있다. 가사를 처음 보고 노트에 ‘성부’, ‘성자’, ‘성령’을 삼각형 모양으로 써놓고 흐름을 화살표로 그려봤는데 ‘성령’과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이었으면 또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곡 자체도 좋았고 연습 때 들었던 ‘우주의 중심에는 관계가 있다’는 설명도 좋았지만, 막상 예배 때 설명은 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멘트 중에 전주가 들어가서 마지못해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06 나의 맘 받으소서 (Kristy Nockels 사, 곡)

     <영원한 사귐으로>와 연결되면서 (즉흥적으로 일어난 건 아닌;) 즉흥예배가 있었는데, 그 시간이 생각만큼 길지 않았던 것 같다. 간결한 목소리들, 간결한 흐름. 이후에도 기도했던 것 같은데 그 시간도 좀 짧았던 것 같은 느낌.



07 그 사랑이 내려와 (Brian Johnson 사, 곡)

     곡과 예배에 대한 이야기는 기억 속에만 남겨두고, 예배 후에 좀 생각했던, 예배장치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자면. 


     회중예배에 있어서 잘 사용되는 기술이 예배자들을 깊이 예배할 수 있게 하는 데에 있어 어지간한 노래 한 곡 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패션2007 월드투어 중 크리스 탐린이 <Indescribable>를 부를 때 ‘Who has told every lightning bolt where it should go’하는 부분에서 어두웠던 조명이 진짜 번개 치는 것처럼 번쩍거리는 것을 경험했을 때 느꼈던 감정, 예배에 있어서 오히려 비본질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잘 준비되고 보조되면 더 깊은 예배로 가는 것을 도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집회에서 역시 브릿지를 지나 다시 후렴에서 ‘그 사랑이 내려와 날 자유케 하셨네’라고 노래하는 순간 눈부신 섬광은 점차 십자가의 형태의 그림자로 드러나면서 노래가 담고 있는 상징을 직관적으로 보여줬던 기억이 생생하다. 예배팀이 공교한 악기 연주, 혹은 싱어가 노래, 인도자가 유려한 가사 불러주기만 연습하는 것보다는 사실상 눈에 보이는 영상, 조명에 대한 연구도 못지않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안되는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08 주께서 다스리네 (김재우 사, 곡)

     1절에서는 <그 사랑이 내려와>에서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했던 것의 설명, 2절에서는 <내 구주 예수님>처럼 개인적 고백이 세계적 고백으로 확장된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 제한되어 있던 보편화된 예배 구조에서 ‘(이 땅을 포함한) 우리’와 ‘삼위일체 하나님’로 관계적 부분을 확장하면서 예배 전반부의 ‘개인으로서의 예배자’가 후반부의 ‘온 세계와 온 시대를 관통하는 교회의 일부임’을 여는 예배의 전환점이다. 그 맥락에서 곡 안에서 ‘개인’이 ‘만물’로 전환되는 지점은 브릿지였는데, 브릿지에서는 이미 “만물로 전환된 상태”를 선포하는 것에 가까워서 급전환되는 느낌이 조금 아쉬웠다.


     “Yes, Lord”하는 일종의 감탄사를 대놓고 가사로 넣은 참신함이 매력적이다. 심지어 리듬도 “예- 주님”



09 With One Heart (Josh Davis 사, 곡)

     평소에 예배곡, 혹은 찬양에 영어가 들어가는 것이 너무 어색했다. 완전히 원곡을 부르는 것이면 모르겠으나, 실컷 한국어 가사로 부르다가 마지막에 'We're the Jesus Generation’이라고 영어로 노래하는 것이라든가, 실컷 한국어로 부르고 마지막에 가서 ‘You are good’이라고 하는 오글거리는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이 곡의 경우 외국인과 함께 예배할 때 부르는 노래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영어로 같이 부르는 것이 본디 목적에 더 부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기회가 허락됐었다면 <Alle>를 여러 가지 언어로 부르는 것처럼 불러봤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고. 이를테면 중국어, 일본어를 섞어 동아시아버전으로 부른다든지...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과 함께 한국어로 예배하고 노래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색할 수도 있었을 텐데 개의치 않고 거의 대부분의 가사를 한국어로 소화하는 조쉬 데이비스 목사님을 보면서 그가 경험하고 바라는 교회라는 것이 언어와 민족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이 분이 경험하는 교회라는 것의 스케일,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할 교회의 스케일에 대한 흐릿하지만 분명한 개념이 잡혀갔다. 가능했다면 초대교회 교인도 예배인도자로 세웠어야... 흠흠. 그리고 예배 내내 외국에 나온 보통의 백인의 자유분방함을 넘어서는 예배 안에서의 자유로움이 느껴져 좋았다. ‘한나로 푸르쉰’이나 ‘괘차나여?’ 같은 어록(?)은 덤.



10~13 Global Medley

 - Yesu Azali Awa (Congo)

 - Loue, Loue (Haiti)

 - Baba Al Fi Sama (Sudan)

 - Elai, Yesua (Arabic) –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내가 찬양을 인도하는 우리교회 오전예배 찬양시간은 젊은이에게나 장년들에게나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어린 평신도가 편곡된 찬송가를 가지고 오거나 전혀 들어보지 못한 노래들을 가지고 와서 시끄럽게 부르는 것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장년들과 지루한 찬송가에 질려하는 청년들 사이에서 나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때, 우리는 어떤 노래로 노래할까요. 느린 찬송가도 아니고, 빠른 젊은이들의 노래도 아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마음 자체가 강력한 찬양이 되지 않을까요”하고 말이다. 노래의 스타일이, 비트나 템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주께서 다스리네>에서 만물을 향해 확장된 세계적 시각은 전 세계의 크리스천의 노래를 함께 부름으로써 로컬 예배자들의 몸에 익는다. 워낙에 노래와 연주가 흥이 나서 좋았지만, 먼훗날 나올 모든 언어로 노래할 그 날의 예배에 미리 잠깐이라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부르는 노래’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노래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은 내 취향과 문화적 아집에서 벗어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장르를 파괴하고,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부수는 노력이 우리 예배 안에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최근에 알게 된 콩고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 덕분에 한국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친구들의 예배 모임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별 것 아닌 악기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노래로도 엄청난 그루브를 내는 것에 감탄스러웠었다. 점잖은 한국인의 한계인가, 한국 크리스천의 한계인가, 신나긴 한데 그루브를 제대로 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게다가 콰이어 석에서는 드럼 비트가 잘 안 들렸기 때문에 서로 제각각 치는 박수소리는 처참할 정도였... 흐흐흐...) 이럴 때 몸치인 게 그렇게 원망스럽다.



14 두렵지 않네 (김재우 사, 곡)

     노래를 배우고 나서 바로 농담처럼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던 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가사로 노래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 싶은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고 노래하는 것이 불편하고 힘든 현실을 도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하지만 노래 자체가 이 땅에서 압제 받는 크리스천들의 노래라는 설명과 기도가 덧붙여지면서 ‘전 세계의 교회와의 연대’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리허설을 하면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 스스로의 고백이 아니라 (물론 우리 스스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예배 안에서 소화되는 측면으로 따지자면) 숨죽이면서 노래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기능적 측면에서 부르는 것인데 전조를 두 번이나 하면서 고조시키는 것이 필요하겠느냐는 의문이 그것이다.



     노래를 처음 배우고 드레스 리허설까지 네 번이나 부르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불편함은 사실 예상외의 곳에서 풀렸다. 그 지점은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가 사실은 안전하지 않은 사람이 부르는 노래'라는 이야기와 함께 '사실은 이 노래도 두려운 사람의 곡'이라는 실장님의 설명이었다. 사람들은 다 웃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설명이 이 노래를 답답한 정신승리에 그치지 않고 예배로 표현해낼 수 있게 한 가장 큰 변수였다. 노래만으로, 어떤 곡의 루틴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를 발굴해내고 그것을 깨끗하게 정의내리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다.


     전조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건 못들은 걸로, 흠흠.



15 만물을 화해케 해 (김재우, 최요한 사, 곡)

     왜인지 스타세일러의 <Lullaby>가 생각나는 매력적인 멜로디로 골로새서 1장 13-20절을 풀어냈다. 의미 없이 거룩한 몇 개의 단어를 연결해내서 적당히 만들어내는 곡들이 무수히도 많이 발표되는 요즘, 성경의 맥락을 제대로 짚어낸 스크립처 송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늘 했었는데 이 곡이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8분의 6박자에 대한 개인적 애정과 스크립처 송에 대한 지지로 앨범이 나온 후에도 사랑하는 곡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예배 안에서 잘 풀려지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 앞의 글로벌 메들리와 <두렵지 않네>에서 확인한 교회의 통전성(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을 선포하는 맥락인데, 그것이 선포되는 것이 예배의 중간쯤에 배치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과 십자가의 구속으로 온 만물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한 사실 아래 교회가 세워진 것을 생각해보면 <그 사랑이 내려와Love Came Down>나 <주께서 다스리네> 뒤에 배치되는 것은 어땠을까.


     ‘우리를 초대하네’의 원래 가사가 ‘열방을 초대하네’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도 곡의 수정과정을 실시간으로 엿볼 수 있었던 콰이어 모임의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단어 자체로 따지면 어떤 것을 사용해도 크게 무리 없고, 오히려 열방이라는 단어가 성경본문을 더 잘 담고 있겠으나, 교회에 초대된 이상 우리를 ‘우리’로 인식하는 것이 교회의 연합, 공동체에 더 맞는 것 같으니 잘 수정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정된 게 확실하다고 넘겨짚고 썰풀기;;;)



16 Vision :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고형원 사, 곡)

     말이 필요 없는 명곡. 그리고 앨범의 베스트 트랙이 아닐까. 어노인팅의 가장 첫 앨범 정규1집의 첫 곡이 계시록 7장을 언급하며 불렀던 <주 예수 이름 높이어>, 그리고 곧 나오게 될 11집의 사실상 마지막 곡이 같은 상황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요한계시록 7장 9~12절)


     한국인이 한국인의 정서, 멜로디로 풀어내면서 가장 복음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곡만 한 한국의 예배곡이 있을 수 없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그 노래를 한민족 문화권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이방인이 한국인과 함께 부른다는 장치 또한 ‘교회, 관계로의 연합’이라는 주제의식을 꼼꼼하고 단단하게 받쳐낸다. (공동체를 상징하려는 무대적 장치는 첫 곡에서 네 명의 인도자가 한 소절씩 부른다든지, 기타를 들고 놓는 루틴이 완전히 정해져 있다든지 하는 사소한 곳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다. 단순히 사운드가 안 겹치게 하기 위한 것일수도 있지만 인도자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과 달리 사소한 행동도 사전조율이 됐다는 측면에서.)


     Josh 목사님이 번역된 영어가사로 부르며 시작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지 몰랐는데, 어느새 다들 영어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덜덜덜. 「아트오브워십」으로 유명한 그레그 시어가 번역했는데, 가히 초월번역이다. (영어가사를 보고 싶으시다면 그레그시어의 블로그(클릭하면 이동)를 방문하시길 :) ) “Endless praise to salvation’s One true Lord”이라든지, “We cry a loud forevermore” 같은 번역(이 부분은 자막 실수로 집회 때는 자막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게 너-무 아쉽다.)은 후반부에 반복될 “영원영원히”와 공명을 일으킨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배의 순간은 황홀하고 아름답다. 나는 이때부터 시선을 회중석으로 돌렸는데, 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지치지도 않고 손을 뻗고 있는 이들의 최후의 순간을 상상하며 즐거운 순간이 계속되었다. 



17 이것이 영원한 삶 (김재우, 전은주 사, 곡)

     내세에 대한 강력한 갈망은 사실 굉장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현실을 도피하고, 어려움을 회피한 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천국에 대한 소망만을 꿈꾸게 되면서 스스로를 굶주리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미 성취되었지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실컷 노래하긴 했지만 영생이라는 것이 죽음이나 심판 후에 도래하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요한복음 17장에서 선언된 것과 같이 지금 우리 삶에 상존하는 것임을 언급하면서 헬륨풍선처럼 붕 떠오르려는 예배자들을 땅 위로 붙드는 마지막 기도는 우리의 예배가 ‘우리만 좋고 고여서 썩어버리는 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정수제 같은 것이다. 천국은, 영생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단단히 붙잡으며 문을 나선다.



언제나 그랬듯 고민은 깊어져간다

     어노인팅과 함께 예배한 것은 2006년 겨울의 워크샵이 처음이었고 이제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매번 참석할 때마다 좋고, 얻어가는 것도 많지만 응당 대형집회가 그렇듯이 삶과 지역교회에서 지속될 수 없는 부수적인 요건들이 너무 많이 있고, ‘다중집회가 주는 불명확한 뜨거움’과 ‘진짜 내 믿음’을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의식적으로 냉철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며, 의미도 생각도 없이 내 감정에 따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하고 재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진지한 고민 덕분에 예배를 통해, 혹은 블로그를 통해서 다른 예배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들에 감사했고, 여전히 그 부분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걱정되는 것은 이런 집회를 폐쇄적인 지역교회에서 느껴지는 갑갑함을 배설해버리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이기적인 내 마음이다. 예배예술의 문화적인 방법론적 접근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은 그런 것에 움직이시는 것이 아닌데도 내가 속해있는 교회에서 올바르게 예배하지 못하는 일종의 제약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펑펑 울고 예배하고 “은혜 많이 받았어요” 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런 태도가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교회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유지되어오고 있고 그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거대한 교회(그리스도인의 연합)에 내가 속해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또 내가 속해있는 눈에 보이는 교회도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차상위의 가치에 눈을 돌리는 것 - 그게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 이야 말로 정신승리는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잘 씻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각자의 삶으로, 교회로 돌아가서 어떤 공동체, 어떤 영생을 경험할까.


     예배의 흥분이 가시고 차가운 가을밤바람이 들이치니 갈증이 솟구친다. “불평불만 좀 그만해”, “넌 왜 그렇게 고민이 많아?”라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되묻거나 “고민이 많았구나”하고 별 관심도 없이 의미 없는 대꾸를 하고 돌아서는 공동체가 아니라,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공동체에 대한 갈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