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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까지는 못 되는 감상/기독교음악_ 앨범

「20100512, 어노인팅 9집 녹음집회」



이 글은 2010년 5월 12일에 쓰여졌습니다.

  • 네이버 블로그 시절의 리뷰들을 티스토리 블로그로 옮기는 작업중입니다. (그래봐야 대부분 어노인팅 리뷰)

  • 원문을 약간의 윤문하였고 몇가지 틀린 사실관계를 바로 잡았습니다.

  • 글을 옮기는 현재의 시점, 즉 2015년 1월 현재의 생각이 조금 첨언되었습니다.






이 리뷰는 기억에 의존해 작성되었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노인팅의 9집 녹음집회는 2010년 5월 11일에 있었습니다.)

이 포스트는 녹음집회 후기만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정서적 공감이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노래할 수 있는가.

     어노인팅 녹음집회에 참석한 것도 어느덧 네번째. 컨퍼런스나 서울집회, 워크샵이나 그외의 다른 집회까지도 합치면 꽤나 많은 집회를 참석했고, 또 거의 참석할 때마다 후기, 앨범이 나올때마다 장문의 리뷰를 쓰는 바람에 이젠 거의 관계자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듣지만, '집회 내용도 집회 내용이지만 내 생각을 쓰는거니 길어지는거지 뭐...'라는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졸리지만 키보드에 손을 얹습니다. 어노인팅은 집회 당일의 임팩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생각할 거리를 만드니 매번 이것저것 넋두리(!)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앨범도 좋지만, 앨범보다는 예배의 자리에서 더 좋고, 예배의 자리만큼이나 예배를 쌓아올리는 과정도 좋을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매번이네요.


     지구 반대편에서는 지진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목숨을 잃고(아이티 지진), 우리나라에서도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적지 않은 수의 청춘들이 숨을 거둔 상황(천안함 사건). 아주 오래 전부터 지구 전역에서, 또 한국 안에서도 굶주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 겉으로 보이는 상황도 좋지 않지만, 더 심각한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 상황들. 모든 사람들이 -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  황금만능주의와 배타적 자기애에서 자유롭지 못한, 내가 잘되도록 해주는 존재라면 굳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어도 될 것 같은 '기독교라는 종교만 가진 사람들', 그리고 죄의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의, 나의 모습.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굳이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살만한 '기독교인들(이라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들)'. 수만명의 교인수를 가진 교회는 날로 더 커지고, 각 단체에서 여는 예배의 자리는 유래없이 꽉차고 있는 현실과는 정 반대로 사회에서는 약자들이 '죽임 당하고', 교회는 그들을 힘겹게 '외면'하거나 애당초 돌보아야 할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구제와 선교, 봉사활동이 이상한 형태의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한국교회...


     이 땅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있을까. 하나님은 왜 이런 갑갑한 상황을 가만히 놔두시는것일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데 왜 이렇게 세상은 엉망진창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던 요즘. 심지어 이런 고민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기는 한가... 하는 답답한 마음으로 2010년을 간신히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20대 중반의 청년이 하기에는 너무 비관적인가요.) 그래서 꽤 많은 주변의 사람이 '그런거 걱정할 시간에 공부 더하고, 앞으로 어떻게 돈벌고 살건지를 고민하라'고 말하더군요. 그런 말들이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을.... 그런데 어노인팅의 9집도 이런 생각과 같이 결코 쉽지 않은 생각들로 차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요.)


     어노인팅의 콰이어 모임은 그런 의미에서 참 좋습니다. 화려한 음악과 조명이 아니라, 그런 생각들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콰이어 모임의 성격 자체가 아무래도 '곡을 배우고 익히는 것'에 있는터라 그런 소통이 깊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곡한곡에 대한 이야기들, 생각들이 구체적으로 공유되는 단계인 것 같아서 참 좋아합니다. (큰 집회처럼 한곡, 한곡을 먹어치우듯이 넘기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면서 받아들이니 생각이 깊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오히려 녹음집회 자체보다 더 좋다는 말을 많이 하지요. 더불어 화려한 무언가가 아닌 노래하는 것만으로 예배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시간이기도 하고...


     콰이어 모임을 통해 느꼈던 생각과 고민은 예배를 통해 극대화되고,  이후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선명해지는 듯합니다. 그 증거로 이 포스트가 존재하는 것인데, 그 생각들은 이번 예배에 불렸던 노래들을 중심으로 적어보렵니다. 집회 당시의 상황들과 피드백, 곡에 대한 이야기 등등도 적당히 섞어서 하게 될 것 같네요. (저번 7집이나 8집 녹음집회 후기 포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이 포스트는 어노인팅의 9집 녹음집회에 함께 참석한 분들과 참석하고 싶었지만 함께 하지 못하셔서 아쉬운 분들께 읽혀지리라는 전제 하에 작성되었습니다.)


1.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박기범, 이지음 사 / 이지음 곡)

     강동균 간사님(어노인팅 8집의 인도자, 2015년 1월 현재 어노인팅 목요예배의 인도자 및 설교자)의 기도가 끝나고 영상으로 짤막한 메세지가 나왔습니다. '지진과 참사 가운데에 하나님은 계시긴 한걸까, 죄와 어둠 가운데에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가' 정도의 메세지였는데, 곡 앞에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분명 필요한 것이었고, 또 개인적으로 답답해하고 고민하던 생각이라 꽤 공감했지만, 직전까지 '오프닝예배'에서 기쁜 멜로디로 '거룩하신 영광의 주, 왕의 왕 주의 주, 주 임마누엘, 친구되신 주님'을 노래하던 예배자들이 아무런 환기작업 없이 그 영상만을 보면서 감정을 전환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 상황에 대한 애통함, 안타까움이 전제되어야 더 가치있는 고백이라고 생각되기에 더욱 아쉽습니다. 콰이어 모임 3주차에 음악사님이 곡 앞부분에 짤막한 영상이 나올 것이라고 언급하신 적이 있는 터라 아이티 지진이나 여러곳에서 생기는 사건과 기아문제 등의 사진 혹은 영상이 나올줄 알았는데, 실상은 조금 달라서 아쉬웠던 것이지요. 영상을 본 후에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같이 기도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작권 문제가 고려됐을  수도 있겠습니다.)


     장중한 드럼의 비트로 시작해 마단조의 비장한 음률로 진행되는 이 곡이 9집의 노래들 중에 제일 저의 개인적인 심정을 담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도, 내 주변도 참 엉망이고 비참한, 말그대로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는 앨범의 수록곡 중에 제일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노래가 가지는 시의성이 커서 적지 않은 개인 예배자들이 이 곡에 영감을 받거나 정서에 공감하긴 한 것 같습니다.하지만 그것이 대중적인 반향으로 확장되지는 않았습니다. 단조의 8분의 6박자 곡이라는 음악의 특수성이나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노래의 맨 앞에 붙는 바람에 예배시간에 부르면 예배의 흐름을 강제하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곡이 가지는 애통하는 정서가 우리네 예배 안에서 쉽게 소화되지 않는 관습적 측면의 영향이 큰 것이 아닐는지요.

    


2. 주님만이 (강명식 사/)

     이번 9집에서 '메세지의 측면에서는' 가장 단순했던 곡이 아니었나 싶은 곡이었습니다. (그만큼 다른 곡들을 대하는 저의 태도는 꽤나 복잡했던 모양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능력이며 구원이라고 선포하며 시작했는데, 앞의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그래도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십니다!'하는 고백의 확장형이라고 생각하면서 찬양했습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2번째 곡까지 별다른 멘트 없이 진행되는 것 같아서 아직까지는 좀 막연한 느낌이었을까, 생각은 생각대로 많고... 하지만 무엇보다 로마서 8장의 고백이 선포되는게 너무 기뻤습니다. 그 고백을 그렇게 기쁨에 넘쳐서 외치며 선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곡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곡의 전개상 마지막에는 예배자들이 '주님만이'하는 부분만을 부르고 중간중간 명식 음악사님의 특유의 '가사불러주기'나 선포가 함께 하는 식의 구성이었는데, 콰이어석에는 음악사님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내가 선포할래!'하고 중간중간 선포했더랍니다. (리허설 끝나고 인도자 마이크 모니터 볼륨을 키워달라고 부탁드려서 그렇게 해주셨는데 이 타이밍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어요. 뛰느라 정신없어서 못들었던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해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하는 B verse 부분에서 리듬이 바뀌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박수치는 사람들의 리듬은 곡전체에서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재밌다는 것입니다. 콰이어들은 3주차 모임때 리듬의 전환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 조금 신경쓰시는 것 같았는데, 회중들은 그렇지 않은... , 박수치는 것을 굳이 통일할 필요도 없지만 중구난방 박수치는 것도 마냥 웃기고.. 합니다. 그래도 전통적으로 1,3 박자에 박수치는 회중들이 2,4박에 박수 치는 것으로 바뀌어가는 것에서 보이듯이 예배 전체에서 점점 회중들의 리듬감이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다만 그것이 회중들의 리듬감이 나아졌다는 것보다 노래를 기반으로 한 예배의 회중 평균연령이 낮아지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래도 청소년, 청년들이 중장년보다는 월등한 리듬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3.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 기뻐하며 경배하세 (찬송가 편곡)

     평소에 자주하는 얘기지만, 찬송가는 적게는 100, 많게는 200년 이상 전의 미국에서 불리던 노래들이라 새로운 천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조금 지루하게 들리는 편이지요. 그래서 음악사님이 언급하셨던 것처럼 지겨운 듯한 이미지 때문에 그 곡이 가지고 있는 가사적인 측면이 많이 평가절하되거나 소화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적인 예배에서도 가사가 잘 소화된다고 보기에는 너무 편하게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고요. 어노인팅의 편곡방향은 그런 점에서 이미 멜로디의 익숙함으로 노래만 불러서 메세지가 가려지는 것에 대한 경계로 잘 알려진 곡의 코드진행이나 리듬, 과격하지 않은 멜로디의 변화를 주는 쪽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편곡은 주효했습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같은 경우에는 일종의 스캇으로 시작됩니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스캇을 흥얼거리는 것이 조금 생경한 상황이긴 하지만 <나의 슬픔을> 같은 곡의 인트로 멜로디도 이미 그런 식으로 많이 불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괜찮은 장치라고 생각됩니다. 수정된 멜로디 역시 음악사님의 즉흥적인 보컬의 느낌이 살아 있어서 입에 착착 달라붙었던 것 같습니다. (팀 보컬의 강명식化를 넘어서 전 회중의 강명식化) 더불어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기뻐 찬미소리 외치고'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찬양하는 소리를 외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뻐 찬미소리 속삭이고...?'하는 식으로 명백한 오답을 던지는 식의 리딩에서 노련함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그것도 회중들이 인도자보다 좀 어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는 이미 수많은 편곡버전과 새 곡들 - 어노인팅과 다리놓는사람들에서 나온 것만 해도 3개의 버전입니다. <458>, 2008 컨퍼런스 버전, 9집버전 - 이 나와서 전통적인 예배에서 부르게 되면 꽤나 헷갈리겠군...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한창 5집을 들을 때 <주를 앙모하는 자>의 정확한 멜로디가 헷갈렸던걸 생각하면... 으휴.


     바로 <기뻐하며 경배하세>가 이어지는데, 리듬이 약간 변한 버전인데도 다들 금방 적응하시더군요. 노래 배우는 시간에도 느꼈던 것이었는데 이미 홈페이지에서 들어보고 온 것이 분명한 회중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고 적응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걸 생각해보면 노래 배우는 시간보다 홈페이지를 통한 가이드음원의 공유가 더 효과적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동안의 앨범은 번안곡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저작권 문제 때문에 가이드음원이 공유되기 어려웠지만 전곡이 창작곡으로 만들어진 8집, 그 이후로는 그런 부분에서 좀 유연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 같네요. 그것도 일종의 노하우겠지요 :)


     G-F-Em-F로 가는 코드 진행은 누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노인팅스럽다는 생각이 물씬 듭니다 :) 풀밴드와 함께한 색소폰 소리는 이 곡에서 제일 빛이 납니다. 제일 백미는 '기뻐하며 경배하세 기뻐하며 찬양하세' x 부분인데, 5집에서의 '은혜 안에 뛰놀며 주의 영광보리라'하는 부분은 그 앞에서 어느정도 정서적 동의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조금 튀어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의 그 부분은 조금 갑작스러운 감도 있고 해서 회중들이 '이게 뭔가'하면서 얼떨떨해하는 것 같이 느끼기도 했어요. 콰이어모임 2주차에서 콰이어들이 느꼈던 그 얼떨떨함. 그래도 저는 기뻐기뻐기뻐기뻐하며 뛰면서 찬양했습니다. 다들 안 뛰시다가 갑자기 뛰셔서 한창 뛰다가 문득 콰이어석 무너지는 거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이 들더군요. (콰이어석은 스테인레스 골조에 합판을 댄 조금은 조악하고 부실한 구조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숨질때에도 더욱 사랑"이라는 부분이 생각났더라는... 농담입니다.


4. 여호와 주님 (김재우, 전은주 사/)

     이 곡을 처음 배우고 트위터에 적었던 말을 옮기는 것으로 코멘트를 대신합니다.


wizardjustin 이 땅에 정의가 없고, 사랑이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없는 것 같아서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아름다움만을 갈망하기 원하신다는 것.


5. 주의 보좌 (이지음 사/)

     콰이어 모임할때는 이 곡에 깊이 예배할 수 있었는데, 왜인지는 모르게 당일에는 힘들더군요. 아마 조금 낮은 음역이 계속되다 보니까 - 전체적으로 낮은 음역에 멜로디가 형성되다보니까 일반적인 형제들은 낮아서 더 맘껏 선포하고 고백하지 못한 것도 분명히 있을겁니다. 음악사님은 어차피 위로 다니시니까 모르시겠지요. 그래서 저도 위로 다니니 낮아서 목이 아프고 높아서 힘들고... 평범한 음역대를 가진 자의 고난이로다.. - 목이 아파오고 힘들어서 그런것도 있고, '사람들이 조명과 음향 같은 것들에 감화된건 아닐까', '인간의 힘으로 만든 음악과 조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할텐데 사람들은 그냥 감정적으로 격화된거 아닌가'하는 쓸데없는 걱정과 비난, '나는 뭐라고 이 시간에 예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 정죄하고 있나'하는 스스로를 향한 정죄... 하나님만 영광만 바라보도록, 주님의 사랑에만 집중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사실 노래는 거의 안했어요.) 그래서 제가 예배할 때 제일 많이 보는 것은 천장입니다. 나중에는 엎드려버렸지만.


- 정결 (강명식 사/)

     큰 시각으로 봤을 때 예배가 느슨해질 것 같아서 빠진 곡. 어떻게 보면 빠진게 더 흐름을 매끄럽게 하는 것이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필요한 곡이었지만 곡 순서상 조금은 간신히 끼어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지요. 예수님만을 더욱 사랑 뒤에 배치되었다면 좀 달랐을수도 있겠습니다. 어찌됐든 빠졌다는 것...


     이 곡은 <예배인도자 컨퍼런스 2010>에서 약간의 편곡을 거쳐 릴리즈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편곡을 거치기 전의 버전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원곡의 편곡은 D Daug D6 D7으로 진행되는 조금 무거운 느낌이었습니다.


6. 주의 인자하신 그 사랑이 (박기범 사 / 이지음 곡)

     서두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답답하기만 한 세상에서 매일 받는 것이 상처고, 그래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힘겹고, 눈물 흘리며 근심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은데, 그 가운데서 완전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실루엣처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분의 위로, 임재하심, 그것들을 가능하게 한 보혈을 생각해보면 내 근심, 걱정들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들이 정말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더불어서 잠깐의 사랑, 잠깐의 위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소망이 커지는 것을 당연한 것일 겁니다. '내가 발버둥쳐도 결국에는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라겠지'하는 식의 정서로 받아들이시는 분들도 있던데 개인적으로는 나열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한 고백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조금씩 체험하는 하나님의 사랑도 이렇게 감사하고 기쁜데, 나중에 하나님과 함께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결국 내 주님과 함께 사는 것, 나의 영원한 소망

주의 아름다움 안에 사는 것, 나의 영원한 기쁨


7. 예수님만을 더욱 사랑 (강명식 사/)

     매트 레드맨의 「엎드림에서 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세상에는 너무 많은 볼 것들과 들을 것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집중하기 힘들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죠, 우리네 삶은 우리가 잡아야할 것들, 이뤄야할 것들, 준비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교회 안에서도 사역이라는 우상을 잡고 사역의 이유되신 주님보다 사역자체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고, 심지어는 사역의 결과적인 성패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일들도 가끔씩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이야기 한) 음악사님이 '내일 당장 주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판단되어지는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그 한가지로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그동안 너무 다른 것들을 붙들고 있었고 여지껏 근심의 상당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슬프게 하는 많은 죄악들과 어두움들 역시 과감히 떨쳐버리고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해야한다는 것이지요. (정결이 빠지면서 이런 이야기들이 이 곡에서 이뤄진 것 같네요.) 그런 생각들을 해보면 내가 나를 볼 때 너무 작고 보잘 것 없고, 더럽고 추하지만, 그래서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신부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 그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를 바라보면 또다른 하루를 향한 희망과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연습이 필요한 삶의 나날들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삶을 걸고 예수님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8. The Bride 신부의 노래 (강명식 사/)

     최근에 들어서 생겨난 운동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기 때문에 시편 27편에 언급된 단 한가지, 주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한다는 원띵 운동이 있습니다. (관련한 내용은 원띵하우스 홈페이지 에서 확인하세요 :)) <The Bride> 역시 그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할 곡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신부로서 바로 서는 그 때, 그분이 다시 이 땅에 그분의 영광을 비추며 다시 오시겠지요. 원띵 운동, 신부의 영성과 관련한 논란이 있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제 블로그의 다른 포스트, <한 새 사람>에 대한 포스트(http://wizardjustin.tistory.com/133)를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주 말씀하네, '넌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나 고백하네, '주 나의 사랑, 나의 전부'


     노래 외적인 부분을 차치하고 이 노래의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맨마지막에 부르는 이 고백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로 우리를 부르신, 신랑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노래와 그 아버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우리의 노래. 음악사님 2집의 <아버지의 노래><할렐루야 마라나타>의 고백이나 정서가 결합되어서 더 견실한 크리스천의 생각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면에서 음악사님의 예배자로서의 태도는 분명 좋은 본보기일 것입니다. 그 음악적 능력보다 더 중요하게요. 그런데 심지어 라임까지 맞추시다니요!!


9. 경건 (강명식 사/)

     개인적으로 제가 속해있는 성일침례교회 리저스 청년부에서는 정기구제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사실 계획한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묵은 계획안ㅠㅠ 그리고 실제로 사업이 잘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변형돼서 진행되긴 했지만...)  이 사업은 사실 명식 음악사님의 2집에 있는 <흠없는 경건>이라는 곡에 대한 부클릿의 코멘트를 보고 도전을 받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인데요, 2집 부클릿에는 어려운 자들을 돕는 것에 대한 신약의 여섯구절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태복음 2535,45)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317,18)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721)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15~1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경건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서 127)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47)


     이번 앨범에 수록된 <경건> 역시 <흠없는 경건>과 거의 같은 노래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 곡을 부르면서 헌금을 모았습니다. 이 헌금은 (아마)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사용될 것 같은데, 이와 관련해서 꽤, 상당히, 많이 조심하시는 것이 느껴졌어요. 콰이어모임을 준비하면서부터 당일 집회까지 변함없이 진중하게 언급하셨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와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들과 팀휴즈의 말과 매매의 법칙을 깨뜨리는 거저주는 은혜의 법칙, 바로 하나님의 법칙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신 것이겠지요. 사실 크리스천들의 헌금이라는 것이 교회행정을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또 그 행정의 대부분은 교회의 존재를 위해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성전을 높게 세우고, 더 좋은 장비와 기반을 구축하는 것. 부흥회나 수련회 같은 곳에서 헌금얘기가 나와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대부분이 그 많은 헌금의 사용처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닌, 더 큰 성전을 짓는 것 따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그 행정에 구제나 선교 등의 2차적인 재정사용이 있긴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지요. 하지만 크리스천에게 이웃을 돕는 것은 그냥 '선한 일'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명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당신'이라고 고백하는 것보다 '우리'라고 고백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것인데요. 콰이어 모임을 하면서 서로를 향해 이 곡을 부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당일에는 조금 생경한 기분이 들게 하더군요. 100여명의 콰이어가 참석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소유, 이웃을 위해 맡기셨네'라고 손을 뻗으며 노래하니 조금은 불편한 기분이 들더라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집회에 참석했는데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손을 뻗으며 나에게 그런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면 마냥 기쁜마음으로 내 물질을 드리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기우가 들더랍니다. 몰아가기는 아니지만 내가 여기서 헌금을 안하면 크리스천이 아닌가 하는, 헌금을 안하기도 이상한 상황. 물론 많은 분들이 상징적인 헌금을 기쁜(마음이라고 믿고싶은) 마음으로 드리셨지만. 분명 많은 분들에게 선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참석한 사람의 대부분은 10대를 포함한 2,30대였는데, 어노인팅은 대부분 3,40대였기 때문에 그런 기분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전 이 곡을 우리 공동체에서 부를 때 '천국의 소망 품은 우리는~'하면서 부르렵니다.



10. 곧 오시네 (강명식 사/)

     55일에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2011521일에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말도 안되는 내용을 큼지막하게 담고 있는 '찌라시'를 발견하고는 웃은 적이 있습니다. 콰이어모임에서 배웠던 이 곡이 생각나서 그랬는데요. 2011521일 이전에 오실수도 그 한참 뒤에 오실수도, 그것은 우리 모두 알다시피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다시오심을 기대하고 소망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말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많은 크리스천들이 바라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좀 많았는데, 이 시간만큼은 함께한 예배자들이 정말 그 날을 고대하고 바랐던 것 같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주님 다시 오시는 축제의 날을 고대하고 소망해야겠습니다. 참 극적인 날이 되겠죠,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것이 모두 무너지지만 우리에게는 축제의 날이 된다니. '영광 중에 구름타고 주 오시네~ 주님 곧 오시네~' 하는데 하나님이 정말 짠! 하면서 나타나실 것만 같아서 막 설레던 건 저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해요.


11. 내가 매일 기쁘게 (찬송가 편곡)

     한때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이 극에 달해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직접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바라본 쉐키나를 갈망했던 것이죠. 그 강력한 임재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면 진짜 하나님께 내 전부, 없는것도 다 드릴수 있을텐데 하는 마음으로 갈망하던 차에, 이미 하나님의 임재는 다른 형태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성령 하나님게서 이미 내 안에 임재해 계신 것인데, 제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하나님의 영광은 성령의 충만함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구름이 성막을 덮는 것 같은 가시적인 형태가 아닌 내 안에서 어떻게 행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기만 하면 알려주시는 성령님의 임재, 동행하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운전대를 넘겨드린다면 오히려 그 이후의 일은 너무 쉬워진 것이지요. 그래서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을 노래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전 콰이어석 맨 뒤에 선지라 카메라도 안 찍겠다, 신나게 까불었습니다.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좁은 길을 걸으며 항상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함이라.


    콰이어들이 좌우로 몸을 딱딱 맞게 흔드는 것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경직된것 같아 보이고 꼭두각시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효율의 측면에서 그렇게 움직인 것도 컸어요. 큰 집회 가면 공간이 부족해서 두 손 다 들기가 어려울 때도 있고, 좌우로 몸을 흔들다가 부딪히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 7집 콰이어 집회할 당시에 <예수의 이름 부를 때>에서 마지막쯤에 엇박의 섹션이 나왔었는데 그때 콰이어들이 맞춘것도 아니었는데 맞춘것처럼 손을 뻗으며 선포한 적이 있었거든요. 굳이 따라한게 아닌데 비슷한 부분에서 반응하는게 생기는 경우도 예배할때 의외로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


12. 빛으로 (이지음 사/)

    처음에는 조금 노래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크게 납득할 수 없는 곡도 아니었습니다.  이 곡에서 말하는 "빛"이 중의적인 것 같아서 여러 사람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부르기에는 조금 힘들수도 있겠다 하는 기우가 들었거든요. 예수전도단 캠퍼스 워십의 <은혜로다> 같은 경우에는 좀 뜬구름 잡는 듯한 갑작스런 후렴구 - 대체 뭐가 은혜라는거야 싶은 - 에 당황하기도 했던 경험이 있어 그렇게 막연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까 하는....  앞서 우리가 '우리 주는 사랑이요 빛과 진리이시니'라고 선포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 노래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빛이라고 선언한 후에 빛으로 달려간다는 것은, 사실 우리가 그 빛의 일부가 된다는 것, 혹은 또 다른 빛으로 속성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죽음의 문화에 대항해 깨어 일어나는 모습, 우리가 지금 가져야할 가장 큰 결단이고 행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콰이어모임 당시에 헤드뱅잉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는 음악사님의 우스개에 다들 웃고 넘기신 것 같지만 저는 물통에 아주 조금 남은 물을 막 뿌렸습니다-- 몇몇분들은 나중에 사과드리니 웃으며 받아주셨지만, 제 바로 앞에 계셨던 형제님은 조금 불편해하시던 것 같은데... 혹시라도 이 글을 보게 되신다면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


13. 주 예수의 날에 (강명식 사/)

     이 곡은 음악사님 1집에 수록된 노래에 후렴을 붙여서 만든 곡입니다. 사실 1집에서 후반부에 나오는 트랙인데다가 귀를 확 사로잡는 편이 아니어서 그냥 듣는둥 마는둥하면서 들었는데 - 1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곡은 <오직 한 길>이라는... 매니악한가요, 어디가 길이냐길이냐길~-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분의 날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서 참 좋습니다. 그 날이 오면 그토록 보고팠던 그 분의 얼굴을 마주보며 사랑의 노래 부르고 기뻐하며 영원히 아버지를 노래하게 될 겁니다. 사실 노래 자체가 주는 느낌보다 그 전에 부드럽게 깔리는 EP와 멘트가 이 곡의 정서를 잘 잡았던 것 같아요.  집회에서 연주된 곡은 원곡의 편곡과 달라서 기분이 묘하면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8<내 삶의 유일한 자랑>때 느꼈던 흥겨움처럼요. 마지막에 '내 주 예수의 날에~' 하면서 끝나는 부분에서는 사전에 짜맞춘것도 아니었고 정해진 것도 아니었는데 다들 '내 주예수의 날!!' 하면서 외쳤던걸 보면 그 감격이 분명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예배자들에게 공유되었음이 틀림 없습니다. 무엇보다 노래하기 전에 선포된 빌립보서의 선포가 너무 감격적이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삶으로 드리는 경건하고 정결한 신부의 노래,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기름이 되리니

     보통 지역교회에서 매주 있는 예배가 아닌 사역단체 등에서 여는 예배에 참석하면 으레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배 좋았어?"


     저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의 경우 "글쎄...?"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좋았느냐 아니냐로 예배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에 악의적인 의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는 편입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나서 생각을 하다보니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 이제 시작이지~ , 가볼까요~ 물 좀 마시고~'


     예배 당시에 바로 주님께서 오실 것 같이 느껴졌지만, 그렇지 않았고 나의 삶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여전히 끊기지 않은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날의 감정은 일주일이면 사라지고, 그날의 기억은 3개월이면 사라집니다. (일기나 사진 같은 수단들로 그날에 대한 기억을 기계적으로 연장할수는 있겠지만, 수단에 의지하지 않은 날것의 기억은 그닥 오래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노인팅의 예배, 명식 음악사님이 인도한 예배, 수십대의 촬영장비와 음향장비, 화려한 조명, 생애 처음 경험해본 찬양집회의 충격적인 현장... 그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은 지금과 같은 때에는 모든 삶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고,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부딪히기 시작하면 마음이 조금씩 닫히고 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들고... 내년 이맘때쯤이 되면, 아니 몇년 후가 되면 오늘의 기억은 그냥 '현재와는 달리 좋았던' 기억으로 그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예배 안에서 체험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나눔의 체험은 반드시 삶으로 흘러가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삶에서 그 체험은 나의 삶의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합니다. 각자의 삶에 동일하게, 또 특수하게 계시하시고 역사하시는 빛과 진리되신 주님을 매일매일 주시는 믿음으로 따라갑시다. 모두모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