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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까지는 못 되는 감상/기독교음악_ 앨범

「20140623, 어노인팅, 예배캠프 2014 LIVE」





● 이것이 "나"의 예배라?

청년 A는 매주 빠지지 않고 유명 예배사역팀의 정기예배에 참석한다. 모교회에서 이모저모로 하고 있는 일이 많지만, 이른바 찬양예배에 참석하면 일단은 모든 사역에서 해방되는 기분이다. 예배 전에 방송실 믹서를 만지작거리지 않아도 되고, 파워포인트 오탈자를 찾을 필요도 없고, 미리 세팅해놓아야 하는 것도, 예배 오라고 연락해야할 사람도 없다. 그냥 그 자리에 가서 예배하는 것이 전부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혹여나 하울링이 나지는 않을까, 스크린에 커다랗게 주의 바지가 내려와같은 충격적인 오타가 나올까 맘 졸이지 않아도 된다. 서툴고 버벅거리는 인도자의 인도가 아니라 앨범에서나 들을 법한 유려하고 간략한 리딩에 마음만 열면 된다. 대형집회, 전문화된 사역팀이 이끄는 예배에 참석하면, 유명한 인도자와 은혜 넘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 내 신앙도 함께 성장한 것 같은 착시가 생긴다.

 

모교회는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는 곳이다. 안부도 묻고 인사도 한다. 기도제목이라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은 내 약한 부분을 하나둘씩 대답해야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된다. 어색한 인사를 할 필요도 없음은 물론이다. 가끔씩 양옆의 사람과 인사하라는 인도자의 말에 설익은 미소로 쳐다보고 악수하지만 나는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른다.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거든. 방방 뛰면서, 그리고 무릎도 꿇어가면서 노래하고 예배한다고 하지만, 정작 돌아와 우리 교회를 바라보면 한심하고,  죽어있는 예배와 답답하고 버벅거리는 인도자, “예배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 답답해진다.



교회 밖에서는 뭐가 다를까. 학교는 지루하고, 끊임없이 나를 갈구는 상사의 압박은 괴롭다. 알 수 없는 진로와 비전에 대한 생각은 두려움만 자아낸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모든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예배하며 기도할 때, 찬양하고 기도할 때 스크린에 펼쳐지는 찬양의 가사 내 마음을 촉촉히 적신다. "이 모든 게 나를 위한 말씀이고 나를 위한 찬양인 것만 같다." 어디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고 어디서는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 살해위협을 받는다는데, 하나님이 내게는 굶지 않고, 살해당할 걱정조차 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축복을 주셔서 감사하다.


 

여기까지가 내가 느끼는 현재 예배사역이라고 일컬어지는, (꽤 과장된) 일련의 현상을 담은 스냅사진이다. 우리는 왜 무더기로 모여서, 같은 노래를 가지고 함께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예배하는 것일까에 대한, 이 일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해갈되지 않는 목마름처럼 식도를 태운다하나님의 사랑이 왜 항상 "나"까지만 펼쳐지고 나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 사회 전체에까지 펼쳐지지 않는지 괴이하다. 이 현상과 한계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할 것 같지만, 어노인팅의 이번 앨범은 내가 느낀 한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한계를 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노인팅의 신보 <예배캠프2014>전작들이 그래왔듯 - 가볍고 깔끔하다. 무게 잡지 않고 무겁지 않다. 그전의 어노인팅의 정규앨범과 <예배인도자 컨퍼런스 시리즈>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견고한 성채도시였다면, 2012 예배캠프 이후의 어노인팅은 자유도시 같은 느낌이다. 장벽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누구나 진입할 수 있다. 예배 앨범에 걸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적이다. 한곡씩 살펴보자면 그 면면들이 귀에, 또 입에 익숙한 곡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파격적인 시도가 없는 무난한 앨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트랙
주 안에서 기뻐해 정성권 사/

이전에 릴리즈된 적 없는, 앨범의 유일한 신곡이다. “~안에서 기뻐해하는 부분에서 []에서 []로 슬라이드 하듯 쓸어내리며 부르는 ~”가 인상적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절이 채 두 번 반복하기도 전에 따라 부르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한다. “우리의 힘은 주를 기뻐하는 것하는 가사에서 5집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브릿지는 심지어 완전 레퍼런스인걸 보고 굉장히 영리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힘은>이 벌써 10년 됐다니.


기뻐하며 승리의 노래 David Fellingham /

최대한 악보대로 부르며, 안정감을 택했다. (양껏 땡겨 부르던 2집의 보컬이 덜 다듬어진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까. 하긴 그때의 어노인팅과 지금의 어노인팅은 분명 다른 팀이다.) 베이스하행 코드편곡은 이제 예배음반에서 거의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고. 요즘처럼 신곡이 발표되면 며칠 안돼서 모든 교회들이 알게 되는 것과 달리 누군가가 어디서 배워오면 신곡을 불렀던 구전예배음악은 로컬버전이 많다. (신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온 지 10년 된 경우도 있었고.) 연차가 오래된 예배곡을 몇 개의 교회가 연합한 곳에서 부르면 미묘하게 다르게 부르는, 일종의 지방색(!)이 없어진지 오래다. 스스로 노래를 소화하는 것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이 희미해지고, 특정 팀의 편곡에 있는 쉼표하나까지 의미 없이 카피하는 영혼 없는 찬양팀이 양산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각자의 예배의 상황에 맞게 적당히 편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누군가의 말이 유난히 생각난다.


주 신실하심 놀라워 Matt Maher /

호산나 Paul Baloche /

단조로의 편곡이 참신하나, 한계가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편곡을 위한 편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 신실하심이 놀랍고, 죄인의 마음을 흔든다는 고백에 굳이 마이너 코드진행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나는 이 한계를 편곡의 폭이 좁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예배곡에 있어서 편곡은 일종의 포화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모던락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한국예배음악 상황에서, 전위적인 시도를 하지 않을 바에야 할 수 있는 편곡의 폭은 굉장히 좁다는 것이다. 일렉트로니카를 할 수 있을까, 완전 재즈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지역교회의 찬양팀이 수용 가능한 것인가와는 별개로 예배음반사역에 있어서도 새로운 장르의 발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나가수가 망한 이유 편곡의 획일화 가 예배음반사역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을 것이다. (예배음반이야 단순한 음악적 희소가치 외에 다른 무형의 가치가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호산나>는 무난. 무우우우우우나아아아아아안. 굳이 <주 신실하심 놀라워>와 이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이 연결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곡에서도 굳이 이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노래들을 연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I Will Run to You 천관웅 사/

예수 나의 첫사랑 되시네 Tim Hughes /

영어 음절의 효율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한국인이 지은 창작곡에 영어가 들어가는 이른바 천관웅식 작법을 별로 호의를 가지고 보는 편이 아니라 예배곡 번역에 있어서 해요체 도입은 높이 사지만 개인적으로는 흥미가 덜 가는 선곡이다. <예수 나의 첫사랑 되시네>로 이어질 때, 가사의 연결성을 위해서는 후렴이나 프리코러스로 잇는 것은 어땠을까. 편곡은 무난했던 것 같다.


주의 옷자락 만지며 Saul Morales /

믿고 듣는 남미워십. 각자 흩어져있는 예배사역팀이 패션 컨퍼런스처럼 한데 모여서 연합으로 컨퍼런스를 진행하고, 오리지널 남미워십이 참여해 진짜 LAMP의 감성으로 연주되는 것을 기대해보지만 #안될거야아마 예배현장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보좌 앞의 나의 삶이 향기로운 제사로 주께 드려지기 원하네로 끝나는 전 트랙의 가사가 주 발 앞에 무릎 꿇고 두 발을 씻기며하는 가사로 이어지는 트랙의 연결은 좋다. (실제로 그렇게 연결해서 듣는 리스너들이 많을지는 미지수지만)

 

또 전후맥락은 알지 못하지만, 노래가 담고 있는 고백과 이후에 이어지는 기도의 맥락이 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정신호 사/

한국예배사역의 또 다른 물줄기인 마커스의 초기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은 그들의 화려한 음악에 비해 담고 있는 가사가 주로 나의 감정”, “나의 예배같은 개인적인 고백에 한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5JESUS CHRIST MY SAVIOUR - 에서 본격적으로 앨범의 방향성이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전기를 맞이한 것이 매우 좋은 변화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 앨범 <KINGDOM OF GOD>에서는 라는 한계를 벗어나 더 큰 가치에 대해서 노래하는 마커스를 볼 수 있었다.

 

회중예배-공동체예배의 가장 큰 유익은 함께 노래하는 같은 예배자들과 누리는 동질성’, 혹은 예배의 대상에 대한 집중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나를 위해, 나만을 위해 노래할 바에는 개인찬양시간을 갖는 게 더 낫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마커스의 초기 앨범들이 아쉬웠다. (이를테면 <주를 위한 이 곳에>에서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내가 되기 원한다는 고백 같은 것에서 느껴지는 에 대한 과도한 집중에 대한 아쉬움. “내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는 것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내가 되는 것에는 뉘앙스 차이가 좀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예배캠프 앨범에는 유독 []가 많다. “개인이 예배자로서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몇십년째 계속해서 이어지는 예배사역의 열풍을 중간점검 해본다고 가정했을 때, 교회가 세상 속에서 게토화 되고, 예배자들은 늘어나지만 크리스천의 수는 점점 줄어드는 기현상을 보면 개인예배의 회복’, ‘예배자로서의 정체성만으로는 우리만 좋고, 우리만 즐거운율법행위 이상은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다.

 

개인을 만족시키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의 경계가 - 원래도 분명한건 아니지만 - 모호해진다. 어찌됐든 예배사역팀들이 내놓는 앨범은 <회중예배앨범>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반응의 요구보다는 넓은 시야의 가치, 교회 공동체의 소망 같은 것들을 담는 다음 스텝이 담겨져 있으면 좋겠다. <교회여 일어나라><곧 오시네>, 혹은 <경건>에서 다뤘던 교회의 사명을 담는 곡들의 가치가 이번 앨범에서는 사실 잘 느껴지지 않는다.

 

사족_ 왜 우리 예배곡들이 []에 천착하고 매몰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봤는데, 그 이유가 외국곡을 번역하면서 [You]가 제대로 번역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보통 영어곡의 [You]를 [] 정도로 번역하면서 원곡에서 강조되는 두 주체 [You][I] 중에서 [You]가 상대적으로 객체화되고 [I]만 남아서 번안된 곡들은, []는 뚜렷한데 당신 하나님은 제3자화되기 때문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I will worship You><예배합니다>로 번역되면서 흐릿해지는 주체에서 오는 한계 같은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주님 한분만으로 전은주 사/

좋아하는 노래, 코멘트 없음.


그 이름 Paul Baloche & Glenn Pakiam /

앨범에서 거의 제일 근본적인 예배곡에 근접한 곡이 아닌가 싶다. (가장 근본적인 곡은 <승리하리라>인 듯) [예배곡]이라는 구분도 사실 굉장히 모호하긴 한데, 음악을 도구로 하는 예배에서 사실 CCM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맞는 곡들이 적잖게 소화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배]라고 보기보다 말 그대로 [준비찬양] 혹은 [콘서트]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 와중에 <그 이름>은 예배의 고백을 잘 담고 있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주님 내게 선하신 분 Darrell Evans & Matt Jones, Bob Cull /
주님은 나의 사랑 Don Moen /

앞에서 언급한 편곡의 한계를 풀어내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님 내게 선하신 분>에서 과감하게 나 춤을 추네”, “나 주께 뛰네같은 부분을 생략해서 사랑스러운 느낌의 곡으로 재탄생시킨 것은 탁월하다. <주님은 나의 사랑> 후반부에서의 편곡도, 원곡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좋은 편곡이라고 생각한다. #지역교회는못하겠지만

 


예가 조준모 사/

예가는 조준모 교수님의 둘째아들 이름이 아니었던가. 조준모 2집은, 사랑하는 앨범 중 하나인데, 이렇게 예배곡으로 만나니 반갑다. 다른 곡들도 언젠가는 예배곡으로 발굴돼서 회중과 같이 부를 기회를 기대해본다. (<벙어리의 노래> 같은 곡은 예배곡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주 없인 살 수 없네 박기범 사/

이 곡 또한 좋아하는 노래, 코멘트 없음.

 

 

승리하리라 Jon Egan /

<Our God Regins>6/8박자 버전. 노래 스타일만으로 따져봤을 때는 앨범에서 제일 튀는 트랙이다. 10집 이전의 정규앨범이나, 2006 이전의 컨퍼런스 앨범의 분위기와 맞는 느낌을 받는다. ‘간증testimony’이라는 단어는 사실 잘 안 쓰이는 편이라서 흥미로웠는데, 원곡자는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의 가사를 차용해서 부르기도 한 모양. 아니, 곡 자체를 찬송가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는지도.

 

나는 주의 친구 Israel Houghton /

춤추는 세대 Matt Redman /

여성인도자의 음역에 맞게 EC, DC로 조정. 매번 느꼈던 것이지만 D로 부르기에는 많이 높다. <나는 주의 친구>의 베이스라인과 피아노 오부리(!)는 패션2008의 그것 크리스 탐린이 함께 불렀던 을 떠올리게 해서 좋았다. 특이점은... 없다.

 


예수이름이 온 땅에 김화랑 사/

2012 앨범의 <주님의 임재 앞에서>와 같은 보너스 트랙. “나나나나나나나 헤이!”하는 부분이 녹음되어 있는 것을 보니 앞에서 <나의 왕 앞에서>를 부른 것 같은데, 아마도 <춤추며 찬양해> 버전과 가사가 다른 문제가 있어서 잘린 것으로 추정해본다. 전주의 신디사이저 소리가 경쾌하고, 후렴에서 멜로디를 감싸며 매끄러운 조화를 이루며 펼쳐지는 스트링(?)의 대선율이 참 좋다. 개인적으로는 버스에서 마지막 트랙을 들었을 때 약간 울컥했었는데, 가사가 가지고 있는 힘 덕분이었던 것 같다. 사실 색다른 단어를 사용한 것도 아니고, 화려한 화성을 사용한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열정과 사랑, 소망을 도리어 느낄 수 있게 하는 그런 노래, 그런 고백들이 나의 하나님”, “나를 품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보다 선결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 "나의 예배"를 넘어서

예배캠프 2014는 이미 궤도에 안착한 어노인팅의 공교함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는 결정체이다. 이제는 개인사역을 진행하고 있는 前리더의 투박한 우직함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젊고, 자유롭다. 그동안 노래를 들으려고 샀는데 멘트가 너무 많다라든지, ‘지나치게 간주가 길어서 답답하다는 식으로 피드백을 던지던 대중적 청자들 역시 무난하게 들을 수 있는, 간결함에 있어서도 정점에 도달하고 있는 앨범이라고 갈음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예배예술이라고 불리는 사역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예배앨범의 효용이 얼마나 되겠냐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드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은 슬픔으로 동참했지만, 거대한 참극 앞에서 그 슬픔들을 믿음 없는 것으로 치부해 애써 외면하거나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해야한다고 이른 선언을 해버리는 교회의 태도,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 [예배자], [예배]라는 가치에 함몰돼서 정작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예배사역의 한계를 목도하고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할 때가 슬슬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번에 나온 거 들어봤어? 연주 좋던데! 이 앨범 들으면서 많이 울었어 ㅠㅠ” 같은 반응을 할 때는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한국의 많은 예배사역팀이 호주의 힐송과 미국의 패션을 벤치마킹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어노인팅의 고문과도 같은 박정관 목사님이 (예배캠프의 전신이라고 봐도 무방한) 예배인도자 컨퍼런스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그게 벌써 7년 전이다 - “문화의 껍질만을 가져오는 것”은 한계를 가지며, 그 흔적들은 이미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좋은 롤모델인 패션컨퍼런스는 사회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캠페인을 벌이고 조금씩이지만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위해 노력하며, 전 세계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연대하는 식의 활동을 벌이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이미 그들의 음악과 예배를 너무 잘 이식해서 그보다 더 나은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그들이 주도하는 사회 변화와 운동 우리 안에서 어떻게 소화시키고 있는가 자문해볼 때 사실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그런 측면에서 예배사역이 이른바 세상과 동떨어져 예배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자위적이며 내부적으로만 풍성한 움직임을 넘어서 교회로 하여금 뒤틀린 사회의 문제들을 선도해서 품을 수 있도록 산파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은 한국 예배사역의 토양이 미국이나 호주의 그것만큼 농익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나, 전국의 모든 교회에서 찬양팀 없는 교회를 찾을 수 없고, 드럼 없는 예배당을 찾을 수 없다. ‘예배자라는 단어를 안들어본 한국 크리스천은 사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토양은 다져졌다. 이제 본격적인 열매를 얻기 위해 씨앗을 뿌릴 때이지 않을까. 슬퍼하는 자들에게 애가를 불러주고, 소외된 이들에게 격려의 응원을 보내는 것, 교회에 묶여있고, 음악에 묶여있는 예수님을 이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십자가를 밖으로 꺼내놓는 것, 그렇게 움직일 때가 바로 지금 아닌가, 감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