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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까지는 못 되는 감상/기독교음악_ 앨범

「20150106, Advanced Healing(2009), 이대귀」




  • 이 글은 1) <Advanced Healing>에 대한 개인적 감상, 2) 19회 나비공장 공장음악회에서 나눠진 이야기들, 3) 블로그 '영감으로 가득한 세상'의 글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 일부라도 가사를 직접 인용한 부분은 큰 따옴표("")와 함께 글자색을 (앨범커버에 제일 많이 쓰인) 연두색으로 표시했습니다.



너 들어본 치유 무어냐, 그냥 한번 들어본 것인가

     내가 어떻게 이대귀라는 아티스트를 알게 되고, 이 앨범을 사서 듣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앨범이 CCM 앨범을 추천해달라는 말에 제일 먼저 추천하는 앨범이 되었는지는, 처음 알게된 앨범이 나온지 5,6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나 어쩌다 그랬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교회 안의 일에나 천착하던 내가 로널드사이더나 짐 월리스의 책을 읽고 이른바 사회적 회심이라는 것에 화두를 두게 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던 그때 이 앨범을 듣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면 중요하다.


     본디 나는 예술을 대할 때 - 아무리 그것이 수준이 높고 아름다운 것이라 하더라도 - 아티스트의 생각과 성향이 나의 그것과 맞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끼는 편이다. 당시 나왔던 CCM들은 대부분 워십앨범의 스튜디오버전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주제의식을 가졌거나, 이미 기존에 유명해진 곡들을 묶어 내는 수준이었기에 그들의 뜨거운 외침은 오히려 내게 답답한 마음만 안겨주었는데, 그 와중 들었던 이 앨범이 그 답답함을 상당 부분 씻어주었다. 그런 이유로 내가 이 앨범을 유독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지한 통찰을 통해 복음의 본질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뽕맞은 것처럼 현실적인 고민들을 외면하고 예배만 찾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에 공감을, 그러면서 목에 핏대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잠잠하게 봄바람을 기다리는 의연함까지 지닌 이 앨범이 내게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컸다. 나만큼 심하게 삐딱한 태도 - 상당한 문제작이라는 평을 들었던 조준모 3집의 <Pyramid>, <영원한 집> 정도가 내 기본 정서인듯 - 를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CCM 신에서 이 정도로 문제의식과 정서에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이 앨범의 장점은 방향성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노래를 만드는 것, 그것도 기독교의 신앙(혹은 신학)을 기반으로 노래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다. 삶에서의 고민과 치열한 신학적 사유를 통해 노래하고 싶은 것을 구체화한다고 하더라도 음절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라 가사를 쳐내다보면 뻔한 노래, 뻔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다반사. (개인적으로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사>의 가사로 "화목제물", "속죄제물" 같은 단어를 쓰려다가 한정된 음절에 원하는 바를 다 표현하지 못해서 "속죄물"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를 욱여넣었던 흑역사가...) 하지만 이 앨범을 포함해 <예언자들>, <In Awesome Wonder> 같은 앨범들을 보면 16비트 기반이라서 그런지 꽤 많은 가사가 들어간다. <고백, 또 하나의 시23편> 같은 곡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적당하게 얼버무리고 거부감 들지 않는 선에서 다듬은 가사가 아니라 명확한 지점을 설정하고 그것에 대해서 노래하는 메시지들, 그것이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쓰다보니 이건 앨범평이 아니라, 아티스트평에 가깝군.)


     보컬에 대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보통 CCM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기름기 넘치는 느끼한 목소리 - 이른바 홀리보이스 - 가 듣기 거북하다는 경우가 상당하다. 한국어에 성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보통의 말을 하면서도 음의 고저가 정해져 있는 말투로 한다거나, 비음을 꽤 많이 섞는 창법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CCM의 문제만은 아니겠지만 [∫], [t] 발음을 너무 굴려서 부담스러운 경우도 많고.

    하지만 이 앨범에서 들을 수 있는 발음들과 발성은 담백하며, 유려한 톤을 가지고 있어 80년대 포크 가수들의 노래에서나 들을 법한 깊은 정서마저도 느낄 수 있다. 아마 요즘처럼 소리를 최대한 가둬두는 보컬이 득세하는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툭툭 내뱉는듯한 발성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너 지금 곧 들으려나_ 트랙별 감상

흐르는 강물이 갈망하고 (invocation)

생명

     이 앨범이 무지막지한 명반이라고 느끼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려 이 명곡이 앨범의 첫곡이라는 점이다. 첫트랙 <흐르는 강물이 갈망하고>는 앨범 전체를 아우르는 서곡Overture의 역할과 동시에 사실상 첫 곡 <생명>의 전주 역할을 수행한다. "저 흐르는 강물이 주님의 나라의 노래를 갈망하고"라는 2절의 가사를 차용한 제목만 봐도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지 않는가.

     얇은 물줄기가 거대한 강물이 되어 넉넉하게 흐르는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단선스트링과 오케스트레이션의 교차는, 길다면 길게 느껴질 45초가 실제로 강줄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주기 딱 알맞은 시간으로 느껴지게 한다.


     <흐르는 강물이 갈망하고>가 끝나고 2번 트랙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노래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소식이 전해진 부활의 순간, 고요한 아침의 현장을 1절의 덤덤한 목소리를 통해 전하며 시작된다. "두려움의 돌문"과 "죽음에 매여 떨군 고개"로 상징되는, 2000년전 당시의 제자들이나 느꼈을 법한 감정선은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환기와 함께 곧장 내게 직접 이식된다. 차분하고 읊조리듯 시작되는 노래 덕에 관조적인 시점을 유지하던 것은 이때부터 불가능해진다.

    서곡에서 이미 암시된 강물의 시각적 심상, 계속해서 하행하는 베이스라인,"십자가에서 흐르고 흐르는 생명의 강"이라는 가사들은 후렴에서 절묘하게 엮여 마치 내가 그 강의 범람 한가운데 있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느낌은 사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뤄진 일들이 강과 같이 내게 흐른다는 것을 강하게 상징한다.

    그 생명의 물결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간주도 없이 바로 이어지는 2절에서는 강물의 이미지를 바로 받아 "저 흐르는 강물이 주님의 나라의 도래를 갈망"한다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강물은 한강을 의미하며 "갈라진 땅의 인생과 역사" - 학교 입학할 때, 운동권 학생회에서 배웠던 진군가의 "잘려진 반도"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 이라는 표현과 함께 우리가 지금 딛고 있는 현실을 상징한다. 즉, 생명의 소식은 어쩌면 역사적 예수와 아무런 상관 없이 시간적으로 한참 후대, 공간적으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갈라진 땅에까지 흘러들어온,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 거대한 강물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이 곡에서 제일 매력적인 파트는 코러스라고 생각한다. 1절이 끝나는 후렴에서는 들릴듯말듯하게 작은 소리로 화음만 채워넣는 것에 충실해 "우~" 소리만 내다가, 다이내믹이 강해진 2절에서는 본 보컬을 보강하듯 가사 부분부분을 채우고, 반복된 후렴이 최대로 고조될 때 "주께서 하신 일을 우리 누리겠네 생명을 누리겠네"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영원한"이라는 가사를 끼워넣으면서 생명의 강물이 영원한 것임을 강조하는 한편, 아웃트로의 반복되는 "영원히"가 뜬금없게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꼼꼼한 장치로 활용된다.


     (불교용어이지만) 장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여운을 남겨서 그럴까. 거대한 물줄기 같은 노래가 끝나고 숙연해지는 감정을 몰라주고 거의 곧바로 시작되는 트랙의 EP소리가 참 야속하게 느껴진다. 아, 지금도 글을 쓰면서 몇번씩 돌려 들었는데도 그렇다.



고백, 또 하나의 시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되는 시편 23편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사랑하는 성경구절이다. 시편 23편에 붙여진 곡은 몇 곡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푸른 초장에 풀을 한가로이 뜯고 있는 양떼를 상상하게 만드는 목가적인 노래들이 대부분. 하지만 거기에 나오는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구절을 좋아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을지. 'TV는 나의 목자시니' 같은 패러디가 한때 우수수 쏟아져 나왔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성경구절과 삶의 괴리가 적지 않음을 무의식적으로 체감하고 있으리라.


     <고백, 또 하나의 시 23편>은 그런 괴리에서 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 노래다. 오르골 소리 같은 EP 위에 얹어져 "전쟁과 같은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묻는 인트로는 곧바로 시계바늘 소리처럼 똑딱거리는 퍼커션에 쫓겨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마냥 외면하기는 것들 - 집은 몇 평, 연봉은 얼마, 애들은 몇 등, 자아실현, 멋진몸매, 교양'을 나열한다. 그런 와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하는 시편의 고백이 과연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 고민한다.

    하지만 시편 23편을 썼던 다윗은 평생을 '죽음의 골짜기를' 다닌다고 표현할만큼 살해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듯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고, 그가 찬양했던 순간에 느꼈던 어려움과 삶의 무게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그것보다 크면 컸지 작지 않다. 그럼에도 다윗이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부르는 것이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라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주님이 주신 새로운 멜로디'이기에 가능하다. 그 멜로디는 마지막에 차용된 27편 4절의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리라. 우리도 삶의 무게를 딛고 일어나 그 고백에 동참하는 순간 "할렐루야"라고 찬양할 수 있게 하는 구조는 회중찬양의 가능성도 담고 있다. (매우 어려운 앞부분의 고비를 넘어야 한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지만.)




  •  <고백, 또 하나의 23편>에 얽힌 추억 몇가지


추억1_

    신병교육대 대대군종병이었던 나는 매주 3~500명의 훈련병들과 함께 찬양했었는데, 이 친구들은 절반 이상이 크리스천이 아닌데도 매번 와서 "오직! 예수!", "나는 주의 친구!" 하며 목터져라 노래하고 몸을 흔들어제끼면서 일주일간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어쩌다가 외부에서 위문차 온 찬양팀이 <실로암>같은 곡을 하면, "우린 그런 노래 모르니 <나는 주의 친구>를 내놓으라"고 하기도.) 그 모습들이 얼마나 흥겨웠는지 몇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그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여느때와 같이 폭풍과 같은 찬양시간과 초코파이 시간이 끝나고 중대별로 퇴장하는 시간에 썰렁한 분위기가 어색해서 이 노래를 틀었는데, 훈련병 친구들이 흥이 안 가셔서 그랬나, "(전쟁과 같은 매일의 삶 속에서) 속에서!", "(우리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있을까!" 하면서 생전 처음 듣는 노래를 따라하지 뭐야. 그런데 정작 노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나오는 가사가 워낙 빨라지니 따라할 수 없어서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을 낄낄거리며 봤던 기억이 난다. 


추억2_

     대대군종병이라 주말이나 주일에는 당직근무를 설 수 없어서 공휴일 당직은 대부분 내 차지였다. 휴일에는 어차피 눈치줄 간부들이 출근하지 않아 내 CDP와 행정반 컴퓨터용 스피커를 연결해서 노래를 들으며 근무를 서곤 했는데, 당시 소대장은 이 노래의 후반부의 "할렐루야~"가 반복되는 부분을 듣던 중 할렐루야에 최면 걸려서 교회 나가야 할 것 같다며 농을 던지기도 했다.




그 나라가 오네

     '하나님 나라'는 아티스트 이대귀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주제다. 그의 문제의식은 대부분 하나님 나라와 괴리된 우리의 삶에서 출발하고, 어떻게 하면 그 괴리를 극복할까 고민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아주 오래 전에 청년부에서 성경공부에 마음 있는 사람들과 함께 마가복음 공부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던 친구들이 생각나서 이야기를 좀 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흔히 말하는 '황금과 수정으로 가득차 있고 죽으면 가는 나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그 자체', 그리고 그 주권이 세워지는 모든 곳을 뜻하는 곳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은 그 나라를 두번째와 세번째 정의로 이해한다는 반증이 된다. (죽어서 가는 나라는 우리가 그 나라로 '가는 것'만이 가능하니까.)

     "그 나라가 와서 약한 자들의 나라가 된다"는 선언을 "그분의 능력 안으로 들어간 자들"과 "그분의 영원한 생명 얻게 된 자들"이라는 단서로 비추어보면 결국 "그 나라"라는 것은 그분의 능력과 생명 안에 거하는 것, 그 자체다. "그 나라가 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선포된 바 있는 <생명>의 되새김질이며, 동시에 뒤에 이어질 "진정한 치유"에 대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6/8박자의 곡이 대부분 그렇듯이 박자는 어렵지 않으나, 전주가 끝나고 노래가 시작되는 부분의 갑작스러운 전조이기 때문에 낯선 느낌이 나기도 한다. (실제로 전주만 듣고 딱 맞춰서 따라부르기 어렵다.)



봄과 같아서

     <봄과 같아서>는 피아노 버전과 기타 버전으로 녹음되어 각각 5번째와 마지막 트랙에 실려있다. 워낙 잘 알려진 곡이라, 따로 뭐라고 코멘트가 필요할까 싶어 과감히 스킵. 대신 노래는 들어도 끝까지 보고있기는 조금 민망한 영상으로 설명을 대체한다. CBS, 이 무심한 놈들아, 연출을 이렇게 하다니!!






내가 들어갈 문, 가야할 길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스펙, 명함, 호칭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누군가 말했듯 한국인들은 '~씨'라는 호칭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 전 의원' 같은 요상한 호칭도 생기지 않는가. 크리스천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신학공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고 얘기했던 그 언젠가, 그 고민을 들었던 사람들이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 "영어는 기본이다", "학위는 어디어디" 같은 이야기를 조언이랍시고 하는 것을 보며 많은 실망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현실감각의 차원이 아니었다, 처음한다는 소리가 그랬던 것이 너무 큰 실망이었던 거다.

     내가 이상주의자라서 그런가, 단순한 반골이라서 그런가, 내게는 그런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모두가 성과를 중요하게 여긴다. 모두가 직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예배때마다 등장하는 어디어디 구청장님, 어디어디 박사님 같은 지위 있는 사람들을 떠받드는 것들이 너무 불편하다.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현세의 출세와 성과에 목을 매고, 목숨을 거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다. 나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질주하듯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서른이 다 되도록 뭐 하나 일궈낸 것 없이 쭈그려 앉아있는 거울 속의 불안한 내 표정을 본다. 끊임없이 낙오하지 않기 위한 두려움에 진저리치고 있는 떨리는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때 "부드럽지만 언제나 강한 나를 부르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면, 비록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아무 의미 없어 보이고, 초라해보이더라도 좀 씩씩하게 걸어나갈 수 있을텐데, 사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아니, 어쩌면 사실은 내가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서 지금은 멀리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척하는건 아닐까.

     이 모든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말없이 기다려주는 그분을 향해 조금씩 걸음을 옮긴다. 무릎이 시큰거릴 정도로 불안하고 두렵다. 그래도 같이 걷는다면, 옆에서 응원을 좀 해준다면 해볼만하다.



깊은 신뢰

     포기해야할 것이 많고, 가지지 못할 것이 많다는 것이 뻔히 보이는 삶을 그나마 의연하게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신뢰가 있기 때문일테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신뢰가 상호간에 충분히 쌓였을 때, 앞서 말한 '내가 가야할 길'로 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이리라. 내가 이 경지의 고백을 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부러운 마음에 가사를 적어 옮긴다.


모든 것을 믿고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사랑의 힘 믿으며


가끔 무뎌질 때도 있고 너무 쉽게 대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사랑의 힘 믿으며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나는 당신과 함께 살고

변치 않는 언약 가운데 인생의 의미 발견하며

나는 당신과 함께 먹고 나는 당신과 함께 누리고

당신은 또 다른 내가 서로를 더욱 이해하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요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

영원한 나의 고백 당신만을 사랑해요


     노래가 끝나고 느린 보사의 리듬은 박자의 전환 - 라틴 리듬이긴 한데 이걸 무슨 리듬이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다 - 과 함께 속도감을 내면서 페이드아웃되는데, 이게 마치 중남미 카리브해로 떠나는 신혼여행 같은 느낌을 준다. 깊은 신뢰를 가진 사이란 이런 것일까.



내가 너를 위로하겠다

     <내가 들어갈 문, 가야할 길>과 <깊은 신뢰>에서의 고백들은 흔들리는 믿음과 고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개인적인 결심과 어찌보면 막연한 신뢰에서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너를 위로하겠다"고 말하는 주체는, 앞선 곡들에서 "삶의 막막함 가운데 찾아오시는 그분의 손길", "삶의 답답함 가운데 빛이 되시는 그분의 말씀", "부드럽지만 언제나 강한 나를 부르는 그분의 음성" 같이 개인의 입장에서 묘사되는 식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너를 위로하겠다>에서는 본격적으로 그 신뢰의 대상이 화자로 등장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단순한 정신승리가 아닌, 실제적인 위로로 전환된다.

     여기서 앨범의 완급 조절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한 번 더 드는 이유는, <봄과 같아서>부터 이어지는 곡들이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스타일, 조심스럽고 낮은 톤의 어조를 가진 노래들을 배치하다가, 위로를 선언하는 주체가 등장하면서 강해진 비트와 함께 사운드가 힘있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앨범의 기본구조는 이곡을 마지막으로 끝내도 해결된다. 



나는 진정한 치유를 바란다

     하지만 이 앨범은 근본주의적이거나 원론적인 수준의 결론에서 그치지 않고, 냉정하게 현실감을 찾아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바라본다.

     지금은 몇년 전 힐링이라는 처음 유행을 타기 시작해, 덕분에 생겼던 TV프로그램이 아직까지 그 수명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힐링을 원하는 시대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호에 맞는 음식을 먹으면 힐링푸드, 좋아하는 영화를 힐링영화라고 부르는, 과잉힐링시대에 진정한 힐링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교회라고 다른가, 치유의 하나님을 울부짖으면서 "시대의 아픔을 모르고도" 개인의 만족에 매몰되어 있는 모습,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쓴뿌리라고 규정하기에 급급하면서 정작 그것을 위로하고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져버린채 뻘쭘하게 손을 뻗고 노래하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는 "어설픈 위로와 축복, 사랑의 말들"이 범람하는 모습이 아닌가. 

     사실 우리가 경험했다고 하는 치유는 진정한 치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밍숭맹숭한 것에 불과하다. 부드러운 것 같지만 단호한 후렴은 "허구에 감춰진 거짓된 선언과 변명"과 "보장된 풍요와 조건, 진부한 구호"를 가지고 '이것이 치유'라며 대충 얼버무렸던 우리 자신에게 "너 말하는 치유가 그나라에 합한 것인지, 경험해본 적은 있는지" 몰아세우며 묻는다.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진정한 치유가 있다는 선언은 <내가 너를 위로하겠다>고 이야기한 그 주체, 즉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그분의 일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는 것이 바로 진정한 치유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verse에 나오는 날카로운 시대평 - 2003년에 쓰인 곡인데 어째 요즘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 - 에 집중해서 속을 후련하게 하는 명곡이라고 생각했는데, 앨범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면 퍼즐이 완성되듯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진 곡 세트가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이 이 포스팅을 하기로 한 결정적 이유였고. 그래서 앨범 제목도 <봄과 같아서>가 아니라 <Advanced Healing>이 아니던가.

     


     사실상 앨범은 여기서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어지는 세 곡은 나들목교회 <마가복음> 강해 설교를 기반으로 쓰여진 곡들로, 앨범 안에 들어있는 EP, 에필로그 혹은 스핀오프로 봐도 좋을 것 같다.



[그가 온 것은 Part 1] 너희는 언제까지 - 예수 그리스도

    몇 달 전에 오전예배시간 갑자기 굉장히 슬퍼져서 혼자 궁상맞게 운 적이 있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란 것이 굉장히 부질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 않아도 될 쓸모없는 일을 하면서 억지로 보람을 찾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가. 만약 우리가 하는게 정말 의미없는 짓이라면, 우리가 의미없는 짓이나 하고 있다면 예수는 왜 그 귀한 목숨을 버렸던 것일까.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그의 성육신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죽음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겠는가.

     어떤 사람은 예수를 '내 병을 치유해주는 사람'으로 여기고, '세상의 야망과 든든한 힘'을 허락해주는 빅브라더로 여기거나 '좋은 얘기나 해주는 사람' 따위로 여기고 있다. "내가 버림받고 고난 당하며 십자가에 못박힌다"며 정색하고 얘기하는데, 그리고 그것이 생명을 흘러가게 하는 "인자가 이 땅에 온 사명"인데, 오해하고 있다, 우리는 자꾸 오해하고 있다.


[그가 온 것은 Part 2] 예수 내가 당신을 이렇게 - 가룟 유다

 가룟 유다는 복음서에서 사탄에 준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울림을 주는 것은 베드로나 야고보가 아니라 도마나 가룟 유다 같은 이들일지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다섯개를 꼽으면 그 안에 꼭 들어가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에서 가룟유다는 꽤 중요한 조연이다. 유다는 무조건 선생님이 맞습니다, 하며 비위나 맞추는 제자들과 달리 유혹당하고 있는 인간 예수에게 일침을 날리며 구원의 마지막 단추를 끼우게 만드는 역할로 나온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목적의식이 뚜렷한 탓이다. 열심당원이었던 유다가 보기에 체제를 전복할 인물로 기대했던 예수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렸을 때, 느꼈던 복잡한 심정을 알게 된다면"에라이, 예수님 팔아먹은 나쁜놈!"이라고 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룟 유다의 고백을 들으며 비난의 칼날을 세우다가도 사실 그 고백의 합리성이라는 것이, 유다가 예수에게 바랐던 모습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합리성이고 우리가 예수에게 바라는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머쓱해지고 '예수를 죽인 것이 바로 우리'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진다. 그래서 "절망뿐, 절망뿐, 절망뿐..." 읊조릴 수밖에.


     사족이지만 이 트랙은 원테이크로 녹음한 곡이면서도 뮤지컬에 쓰이려고 작곡된 곡이라 그런지 감정이 더 깊게 배어 있는 느낌이다. 특히 "힘없고 무능한 메시아"하는 부분에서 "힘없고" 다음에 나오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은 압권이다.



[그가 온 것은 Part 3] 그의 나라는 사랑 위에 (featuring 유미란) - 제자들

     빌립보서 2장을 기반으로 쓰여졌다. 조금은 막연하게 생명을 노래하고, 또 그의 주권과 능력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 또 불안하지만 신뢰를 가지고 걸어갈 수 있는 것, 다치고 답답한 마음이 진정한 치유를 받을 수 있음은 사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한, "십자가에 죽은" 그의 사랑 덕분이다. 모든 문제의식과 모든 고민들은 사실 십자가의 사건이 없다면 존재조차 하지 않을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문제의식의 목표지점은 그의 나라가 세워지는 그 사랑의 증거, 십자가에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흐르고 흐르는 생명의 강에 몸을 담그고 주께서 하신 일을 누리겠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겠네"라고 선언했던 <생명>의 후렴을 "그의 백성은 그리스도 그의 몸값으로 그와 더불어 영원히 사네"라는 말로 받으면서 수미쌍관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너무 과한가.




아직 추운 겨울, 이해할 수 없는 일 여전히 많지만

     앨범은 2009년에 발매되었지만, 수록곡 대부분이 그보다 한참 전에 작곡된 곡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시대상과 문제의식을 잘 담아내고 있고, 현재까지 그 질문들이 유효하다는 것은 그 사유과 고민들이 설익은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묵힌 진국이라는 뜻이리라.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혼탁한 시절인지라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악한 것으로 규정되는 것 같다.

     십자가에서 흐른 영생이 아니어도 현세에 쏟아지는 부와 명예만으로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 남들이 알아주는 직책과 지위를 갑옷처럼 두르고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들, 시대의 아픔은 외면한채 스스로의 치유와 만족에만 천착하는 이기적인 인간상으로 이 땅이, 이 시대가 오염됐다. 더이상 경작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병들어버린 땅에 십자가에서 흐르는 강의 범람이 필요한 때다. 진짜 치유가 땅을 갈아엎을 때가 되었다. 하지만 당위와는 별개로 그 강의 범람, 그 나라의 도래는 아직도 요원해보인다.


     추운 겨울, 진정한 치유를 바라는 외침만으로 치유와 위로가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때문이 아닌지. 치유를 선언하는 외침이 진짜 치유를 일으킬 날을 기대하고 소망하고,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