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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까지는 못 되는 감상/음악_ 한 번에 한 곡씩

20141230, 한 새 사람 - 모든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 어노인팅




고유명사 [5집]

     누군가가 내게 예배실황앨범 딱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않고 이 앨범을 꼽겠다. 어노인팅 5집에 특별한 음악적 가치나 예배예술의 역사적 의의가 월등히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음악을 매개로 한 본격적 예배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 것이 절대적으로 이 앨범의 영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전에는 교회음악에 관심이 없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성가대는 유초등부때부터 했고, 찬양팀도 몇년 했었다. 다만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내가 인식하는 교회 음악들은 '준비찬양'에 가까운 것이었고 기도나 예배할 때 쓰이는 브금 정도였을 뿐. '찬양은 말씀을 듣기 전에 마음을 열도록 하는 것'이라는 뭔가 미심쩍은 목적이 거스를 수 없는 도그마였던 내게 '음악을 도구로 스스로의 예배를 표출하는 것을 방치하는 예배의 형태'는 상당히 생소한 충격이었다. 그런 내게 [5집]은 첫경험이었던 셈이다. (CCM 뉴비인증인가;)

     이 앨범을 처음 들었던 것은 갓 청년부로 올라온 첫 해, 청년부 행사의 찬양시간에 얼떨결에 '프런트맨'(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식은 딱 그 정도였다.)이 되면서였다. 그때 송리스트에 옹기장이의 <주 이름 큰 능력 있도다 - 주님 같은 반석은 없도다>와 어노인팅의 <주를 앙모하는 자>가 있었다. 그 때였다, 내가 예배실황앨범을 처음 들었던 것은. 어떤 노래를 들을 때 앨범 전체를 듣는 버릇은 고등학교 시절 CD를 사모을 때부터 들었던 습관이라 사실 카피할 곡 하나만 들었어도 됐는데 앨범 전체를 들었다. 예배실황과 CCM CD를 사모으고, 워크샵과 컨퍼런스도 가보고, 리뷰도 쓰고... 어줍잖지만 '예배인도자'라는 타이틀도 달아보고, 기타도 치고 곡도 써보고 했던 개인사가 그때 시작됐다.



선명한 주제, 더 선명한 장치

     사실 어노인팅의 앨범들이 대개 그러하였듯 5집앨범의 컨셉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 흔한 부제도 없다.) 아직 발매되지는 않았지만 '관계'와 '공동체'를 주제로 잡은 11집과 '하나님의 타자성otherness'이라는 뚜렷한 영감을 토대로 준비된 6집을 제외한 나머지 앨범들에서 통일된 주제를 유추하기는 좀 어렵다. 하지만 5집 후반부의 세트 - 주님 말씀 앞에 선, 한 새 사람, 모든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 예수는 왕, 모든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reprise) - 는 어노인팅의 전 앨범을 통틀어서 가장 뚜렷한 주제로 견고하게 묶여있는 지점이다.

     예배의 모습이나 원형을 담은 노래들은 많지만 교회라는 집단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는 곡은 사실 많지 않다. 그 주제가 예배의 흐름으로 담긴 경우도 거의 없고 말이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한 새 사람>부터 예배의 최종지점을 다루고 있는 <모든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까지 이어지는 이 거대한 그림은 보통의 노력과 고민으로는 좀처럼 구현해내기 힘든 대작의 냄새를 풍긴다.


     이 트랙묶음의 완성도는 (앨범을 위해 작곡된 것만은 아니지만)  두 곡의 창작곡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이 세상을 이길 주님의 군사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함께 세워'간다(<주님 말씀 앞에 선>)는 가사는 교회와 세상의 대결구도(혹은 분리구도)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교회의 원형에 대해 설명하는 멘트(교회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꿈꾸고 있던 사람이라는 설명)와 함께 교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 주제의식은 뒤에 이어지는 곡, <한 새 사람>에서도 드러난다. '주의 교회는 사탄을 짓밟게' 된다는 예언적 선언과 찬송가의 가사를 차용한 '영광 할렐루야 끝내 승리하리라'는 선포는 계시록에 계시된 예배의 모습이 단순히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대적하는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다음에 찾아오는 뚜렷한 결과라는 느낌을 준다. (낮은 관악기 - 물론 신디소리지만 - 로 시작되는 인트로는 흡사 전쟁을 알리는 뿔삐리 소리 같고, B verse의 드럼이 워드럼 같이 전투적인 비트를 연주한다는 점에서 이 곡의 전반부가 전쟁을 암시한다는 것은 명확해진다.) 


     이런 장치들은 거의 20분 동안 이어지는 트랙들을 단순히 비슷한 곡을 이어부르는 메들리가 아니라 [전쟁]과 [승리], [끝없는 경배]로 이어지는, 교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의 스토리로 탈바꿈시킨다. '사탄을 짓밟'는 싸움이 '온 땅 다스리'는 승리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Bb에서 G로) 극적인 전조가 일어나는데 리스너들과 회중들은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교회의 싸움에 실제로 참여하고 종국에 승리하는 듯한 착시를 얻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모든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의 전조된 콰이어의 노래가 승리의 찬가로 들리는 것이다. 20분 동안 쉴 새 없이 몰아치면서도 이보다 완벽한 구성을 만들 수가 있을까.



이 노래를 지금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노래를 2014년 현재 부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 아무래도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든다. 가나안 성도로 일컬어지는 크리스천의 상당수가 구조화된 교회에 염증을 느껴 교회를 떠나 있는 상태고, 기존에 남아있는 크리스천들 역시 굵직한 교회의 사건사고로 교회에 대한 프라이드를 꽤 많이 상실했다는 것이 점점 심해지는 교회간 수평이동, 가톨릭으로의 선회를 통해서 수치적으로 방증되고 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이며 우리가 지체라고 말하기에는 지체 구석구석이 건강치 못한 상태라는 것이 너무 크게 느껴지고, 그래서 이 싸움을 계속할 추동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제 몸 하나 간수 못하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섬기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건지 하는 자조와 자괴가 먼저 드는 것이 뼈아프지만 사실이다.

     이 곡을 통해 10년 전에 느꼈던 교회에 대한 소망을 10년 사이에 너무 많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단순히 그때 느꼈던 뜨거운 감정을 리마인드나 하자고 듣기에는 너무 아까운 앨범, 너무 아까운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족

    <한 새 사람>이라는 용어는 (데이비드 오워의 삽질로 더 유명해진) 신사도운동의 One New Man을 한국어로 번안한 것이기 때문에 신사도운동의 사상을 담은 곡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가 있다. <한 새 사람>의 작사가이며, 예수촌교회에서 강명식 음악사와 함께 사역했던 손종태 목사가 한국 신사도운동의 한국지부 지부장 격이며, 모든 일을 영적 전쟁으로 치부하는 태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도를 지체로 한다는 가사가 신사도 운동의 [집단적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 등 여러가지 비판이 존재한다.(다음 블로그 링크) (그밖에 <창조의 아버지>가 신사도운동의 주제가격의 노래라는 분석과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어노인팅 9집도 <The Bride>가 신부의 영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종말론에 대한 본격적인 언급이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이 제기됐다개인적으로는 2010년경 이 부분에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이것에 관해서 어노인팅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질문이 올라왔었다. 공식적인 입장은 '어노인팅에서는 이런 의미로 노래하지 않았'다는 것.  (보고싶다면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