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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까지는 못 되는 감상/음악_ 한 번에 한 곡씩

20141103, 내 삶 드리리, 마커스




     남들보다 입대가 꽤 늦었던 탓에 내게 군생활은 주로 "감정과 이성의 압박"에 대한 답답함으로 기억되곤 한다. (좋았던 사람들과 즐거웠던 일들은 분명히 많았지만, 그때 느꼈던 답답함의 감촉은 여전히 차갑다.) 사단신교대에서 처음 맞이했던 예배는 사실 기계적인 교리소개에 불과했고, 여기가 예수를 섬기는 곳인지, 초코파이를 섬기는 곳인지 헷갈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대부분의 신교대 교회들이 그렇듯, 훈련병예배는 훈련병들 중에서 찬양팀을 (군종병 재량으로) 선발해 3,4주마다 바뀌는 시스템으로 꾸려졌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입대했던 주에 찬양팀이었던 중대는 그 주가 마지막이었고, 내가 속했던 중대에서 찬양팀이 뽑힐 차례였다. 그리고 찬양팀 하고 싶은 사람 나오라고 했던 당시 군종병(내가 속한 훈련중대의 조교였던) 조 병장은 나를 포함한 싱어지원자가 자신이 생각했던 수보다 많자, 가위바위보로 절반을 솎아내었고, 평소에 가위바위보라면 지독히도 못했던 어찌어찌 내가 이겨서 찬양팀을 할 수 있었다. (4년 전의 그 가위바위보에서 내가 평소에 잘 내지도 않던 가위로 이겼던게 아직까지도 생각난다.) 그 찬양팀을 계기로 내가 신교대에서 조교를 하고, 군종병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타이밍과 가위바위보의 승리는 단순한 운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인도하심 같은 것이었을까.


     당시 군종병은 막 나왔던 마커스2010의 수록곡을 돌아가면서 불렀는데, 마커스의 2012년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의 마커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당시의 나로서는 그 선곡이 썩 탐탁치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 드리리>의 가사는 이제 막 입대한지 2주밖에 되지 않았던 스물다섯 어린녀석에게 꽤 큰 울림이었다. 내 기분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군종병은 1절 솔로를 통째로 내게 주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진지하게 어떤 노래를 대했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을 쏟아 불렀던 것 같다. 단순히 군생활의 혼탁한 불안함 때문에 부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흐릿하게 서있던 열정이 튼튼한 기둥이 세워지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 후 조교로 2년동안 복무하면서 조교 특유의 구령을 익히느라 목도 많이 상하고, 마커스의 이 노래를 그 때 이후, 또 전역 후에 부른 적도 없었지만, 또 여전히 마커스의 2010년 앨범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날에 이 예배곡에 내가 쏟았던 혼신은 무엇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지금의 내게 그런 혼신이라는 것이 있을까 싶은 자괴와 한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