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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까지는 못 되는 감상/영화광

「그래비티GRAVITY (2013)」




그래비티│GRAVITY

 

<☆☆☆☆☆>

감히 말한다. 이 영화는 올해의 영화다.

 

 

 ● 이 영화를 단순한 S/F 영화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모든 S/F 영화가 인간의 실존에 대해 고민하지만, 이 영화처럼 조용히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읊조리는 영화는 흔치 않다.


모든 것은 수단이다. 심지어 영화의 제목까지도.




안쪽이야기_

 


● 주인공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扮)는 시설전문가다.


그녀는 다른 두 사람의 동료가 제트팩을 이용해 유영하며 놀거나, 춤추는 것처럼 장난치는 것과 달리 묵묵하고 진지하게 할 일만 하며 초반부를 보낸다.


 극 중반에 밝혀지지만 그녀는 우주에 나오기 전 하나뿐인 딸을 잃고, 직장과 집을 아무 의미 없이 반복하는 [살아있지만 죽은 삶]을 살고 있었다.


즉, 라이언이 있는 무중력의 우주가 바로 그러하다. 고요하고 괴로운 것으로부터 해방된. (라이언은 지구에서 이미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그 삶을 멘트 없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정처 없이 운전만 하곤 한다며 표현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중력’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중력에서 벗어난 그녀의 우주행은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괴로운 삶으로부터의 도피’에 가깝다.




● 카메라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유영하며 피사체를 어지러이 잡는다.


시선 전체를 압도하며 돌아가는 지구의 모습과 우주의 어둠은 보는 것만으로도 우주공간에 있는 것 같은 공간감과 무중력을 선사한다.


즉, 관객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카메라 워킹에 '땅을 발로 딛고 서 있는 안정감' 대신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 그러던 차에 러시아 위성의 잔해로 생긴 사고는 세상, 혹은 삶과 단절되기를 원했던 라이언에게 하나의 전환으로 작용한다.


강한 충격으로 우주선에서 멀리 떨어져버린 그녀는 비로소 진짜 ‘죽음’ ‘고요’에 대해 느끼게 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한다. (“나 죽기 싫어!”같은 삶에 대한 소극적 의지)





계속되는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 扮)의 격려와 설득은 라이언에게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삶/죽음에 대한 양비론적 회피를 벗어나 ‘살고싶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 (그가 던지는 [푸른눈]이나 [털이많은남자]의 이야기는 삶 자체에 대한 우회적 표현이다.)


 



● 그리고 가까스로 해치를 열고 (이때 ‘확’하고 열리는 해치는 별다른 장치가 없음에도 그 자체만으로 극적이다.) 산소를 다시 맛봤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에 대한 소극적 의지]는 비로소 [“살고싶다”는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로 전환된다.


이때 라이언이 우주복을 벗고 편안한 자세로 그 삶을 체감하는 순간이 자궁속 태아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장면은 이 영화를 통틀어 압권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산송장이 삶을 갈구하는 존재로 태어나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태어난 것은 아니다.




 

● 이쯤 돼서 어지럽게 둥둥 떠다니던 카메라워킹이 고정되기 시작된다.


정처 없이 떠돌던 주인공의 물리적 공간이 고정되면서 안정되는 것과 동시에 삶과 죽음, 소통과 고독 사이에서 정처 없이 헤매던 라이언의 심리가 삶과 소통으로 고정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라이언은 휴스턴(나사의 코드네임)과 적극적으로 교신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전혀 통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도 꼬박꼬박 ‘휴스턴’을 붙이면서 소통을 시도한다. 그전까지 통신을 통해 들려오는 음악소리에도 짜증을 냈던 것과 극히 대조적이다.)




 

● 하지만 삶은 녹록치 않다. 간신히 소유즈에 탑승하고 엔진에 점화만 하면 되는 상황에 연료는 바닥이었고, 극도로 절망스런 상황은 라이언을 다시 삶에 대한 포기로 유혹한다.


가까스로 교신에 성공한 대상이 지구의 한 가정임을 발견했을 때, 라이언은 자신의 상황을 확인하게 된다.


누군가보다 처절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그녀는 좌절하고 소유즈의 산소포화도를 낮춘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 이때 나타난 맷 코왈스키는 사람의 삶에 있어서 [나와 같지만, 다른 존재]가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은유한다.


사고 후 처음 우주 속에 버려졌을 때 그의 적극적인 교신이 없었더라면, 그가 거울로 자신을 확인하며 말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좌절하는 자신을 계속해서 삶으로 이끌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소유즈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을 것이다.


산소결핍상태에서 만난 맷은 [내 속에서 살고 있는 타인]인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영화전개상 연착륙엔진을 생각해내게 된 장치로 작용하지만, 그 상황을 알고 있던 것을 삶에 대한 의지가 불러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험 볼 때 머리를 쥐어짜면 가끔씩 잊고 있던 것들이 기적적으로 생각나는 것처럼.)


자신을 끝없게 괴롭게 만들었던 딸이야기의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면서 라이언은 비로소 완전한 삶을 향한 질주를 하게 된다.



 


● 중국 정거장에서 텐공(天空)을 간신히 타고 지구로 착륙(이라 쓰고 추락이라 읽는다)하는 과정에서 ‘될 대로 되라지!’라고 외치는 라이언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더 이상 고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모두 초극한다.


삶을 되찾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이원론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초월을 경험한다. (텐공이라는 말이 중국어로 ‘하늘’인데, 추락하는 텐공에 구멍이 뚫리고 나오는 장면은 마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을 생각나게 했다. 말장난인데, 그 장면이 웃겼다고....)




 

● 탈출선 안으로 왈칵왈칵 쏟아지는 물처럼, 어미의 뱃속에서 터진 양수를 헤엄쳐나와 고개를 내미는 것은 [태어남]을 상징한다.


감독은 물 (바다인지 호수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에 지형이 많았으므로 아마도 호수) 속으로 잠겨버린 우주선에서 빠져나와 그가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힘겹게 중력을 느끼며 간신히 일어나 뭍에 한발을 내딛으며 끝나는 이 영화는 삶은 삶에 대한 의지, 그 출발만으로도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큰 소리로 역설한다.

 


“살아라. 그것만으로 당신은 가치 있다.”

 

 

 


바깥이야기_




 




● 체감상 몇 분 이상으로 느껴지던 초반도입부는 굉장했다.


[음향없음]이 가장 큰 음향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게다가 시각을 압도하는 지구의 스케일이란!






 


● 산드라 블록은 발랄한 이미지의 역할만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좌절과 절망에 빠진 열기를 잘 살려냈다.


90분의 러닝타임 동안 부족함 없이 잘 메운 호연이었다.


무엇보다 64년생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몸매는 극이 표현하려는 각 씬에 알맞았고, 또 아름답기까지 했다. (태아를 형상화한 씬이나, 마지막에 수영으로 뭍으로 나오는 씬을 떠올려보라.)


 



  영등포CGV 스타리움에서 봤는데, 스크린 세로 높이가 더 큰 아이맥스에서 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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