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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까지는 못 되는 감상/영화광

20140406, 노아




1.
    서사적 구조를 가진 예술은 대개 두 가지 방식으로 기능한다. 첫째는, 그 이야기 자체의 흥미로움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스토리텔링으로 기능하는 것이고, 둘째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본래 하려는 이야기는 내면에 숨겨져 있는, 즉 눈에 보이는 이야기 전체가 주제를 상징하는 거대한 비유가 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모든 서사는 대부분 이 두 가지 방식 중 한가지로 기능한다. (둘 다 충족시키지 못하면 <망작>이 되고, 둘 다 충족시키면 <명작>이 된다.)

2.
    영화 <노아>는 위 두 가지 중 철저하게 후자로서 기능한다. 시종일관 노아가 나오지만 영화는 노아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순수한 '이야기'로 보기에 이 영화는 호흡이 지나치게 길고, 전개가 지루하다. 스크린을 수놓는 거대한 CG와... 배우들의 연기는 사실 좀 더 내면의 무언가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아니면 누구 말마따나 이도저도 아닌 그냥 망작이거나.

3.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성경의 노아의 이야기와 같지 않다고 비난하거나 욕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접근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노아>가 성경의 내용을 알지 못하거나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하지만 창세기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들에게까지 이 영화가 ‘성경의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는지’ 헷갈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다. 이른바 ‘감시자들watchers’로 나오는 타락천사들의 모습이나 극 초반의 므두셀라가 바닥으로 내리찍는 화염검의 ‘판타지스러움’은 “이것은 일종의 허구임”을 힘주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즉, “성경에 이런 게 나와?”라고 묻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성경에서 모티프를 따온 좀 지루한 판타지일 뿐이다. 그뿐이다.

4.
    그런데 이런 이들에게 이 영화를 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이 영화가 허구임을 아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성경이 아니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못 보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이 영화를 못보게 된다고 성경 읽으러 달려갈 사람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크리스천이 되지 않는 이유는 노아의 곡해된 이야기 때문이 아니며, 난 앞으로도 그게 이유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5.
    그럼, ‘<노아>는 허구’라는 것을 아는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어디인가. 나는 노아와 대립각을 이루는 거대한 축이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5-1.
    첫째는 두발가인-함으로 이어지는 ‘순수한 욕망과 죄악’의 축이다. 이 경우는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죄악된 세상 대 의인]의 전형적인 구도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는 홍수로 끊겨버리는 가인의 계보가 두발가인에서 함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둘이 연대해서 노아에게 대항하는 방향으로 비교적 잘 담아냈다. 두발가인이 방주에 승선하는 것이 조금은 무리한 설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두발가인 자체의 캐릭터성이 지나치게 평면적이었던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5-2.
    노아와 대립각을 세우는 두 번째 축은 [노아의 아내]이다. 방주가 완성될 즈음, 죽을 것이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뇌하는 노아에게 아내가 한 말은 인상적이다. “우리는 착한사람들이잖아요.” 이 말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주제인 “인간은 모두 악하다”는 전제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녀는 모든 인간이 죽어야하지만 예외적으로 노아와 그 가족만 살아남도록 '선택받았다'는 매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순진하고 무심하다. 다른 사람들은 죽게 되어도 '착한 사람들'인 노아와 자신, 자신의 아들들의 생사여부에만 관심이 있다. 개인의 구원과 자신과 관련된 것에만 관심이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구원관을 교묘하게 닮았다. 그녀는 ‘정의’ – 성경에서는 [공의]라고 쓰이는 - 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당장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그것에 집중한다. 당연히 그녀의 존재는 영화가 전개될수록 노아와 거세게 부딪힌다.

5-3.
    마지막 축은 바로 [노아 자신]이다. 그동안 내가 성경을 보고 설교를 들으며 느꼈던 노아는 굉장히 평면적인 인물이었다. 당대의 의인이었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라고 성경에 기술된 것처럼, 하나님이 방주를 만들라하셨으니 우직하게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방주만 만든 사람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동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만 하는 재앙을 앞에 두고 아무런 갈등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동안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의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변호하기 위해 ‘노아가 사람들에게 재앙을 선언했지만 사람들이 듣지 않았다’는 말을 가져다붙이지만 성경에는 분명 없는 말이다.)

6.
    분명히 노아는 고뇌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악행으로 멸망하게 되었고, 자기 또한 그 악한 인간 중에 하나라는, 원죄로부터 이어지는 거대한 죄악의 물줄기의 일부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노아의 고뇌는 분명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의 고뇌에 준하는 것이었으리라 상상해본다. 그런데 이 자각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착한 사람’이라는 순진하고 무심한 생각을 가진 그의 아내보다 진일보한 이 깨달음은 곧장 “정의의 실현”이라는 행위로 수렴된다. 방주에 올라타려는 두발가인의 군대를 온갖 무기로 찍어 누르고 살점과 피를 사방에 뿌리는 잔인한 노아의 살육이, 또 일라의 두 딸을 기어코 잡아 죽이려는 몰인간적인 행동이 “신적 정의의 구현 = 인간의 멸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노아는 가인의 자손들을 방주에 못 타게 막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방주에 타지 못하게 한 것이고, 두 손녀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노아는 세 번이나 말하지 않는가, ‘인간은 멸망해야한다’고.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

7.
    이쯤에서 우리는 영화 내내 “창조주Creator”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홍수로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이미지로 된 환상'이며, 그것이 ‘모든 인간은 멸망해야한다’는 신명(神命)으로 둔갑하는 것은 순전히 노아의 머릿속에서만 이뤄지기에, 관객들은 그 전개를 쉬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흐름을 대부분 관객이 잘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굳이 설명하지 않는 영화외적인 장치고 볼 수도 있겠으나, 환상은 뱀-가인-홍수-죽음의 이미지를 건조하게 보여주는데서 그치지는데 반해 노아가 단편적 이미지를 씨실과 날실로 엮어 직조해낸 ‘창조주가 바라는 것은 인간의 멸망’이라는 결론의 성급함은 너무 뚜렷하다. 이것은 “창조주가 인간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중요한 전제가 빠져있는 절름발이 명제이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 부분이 꽤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노아마저 죽어야한다는 것이.

    이부분이 노아에게는 어쩌면 필연적인 추론과정일지도 모른다. 인간들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평생을 인간들을 피해서 살았던 아웃사이더 노아에게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8.
    홍수가 그치고 노아가 일라의 두 손녀를 죽이려고 하던 그 찰나에 일라가 두 딸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할아버지-아버지에게서 내려와 자신을 거쳐 후세로 이어질 [인간다움-조건 없는 사랑]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은 하지 못하겠다’며 칼을 떨구고 그곳을 벗어나는 장면은 두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켜켜이 쌓아놓은 '몰인간적믿음'이라는 불협화음이 눈녹듯 해결되는 절정의 순간이다. 그가 거절한 것은 공의를 지키라(인간은 모두 죽어야한다)는 창조주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안도감의 생각이 스펀지에 스미는 물처럼 관객의 바싹 마른 불안감에 스며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본디 창조주의 명령이 노아와 그의 가족을 통해 일궈지기 시작할 때 하늘에는 그때야 비로소 언약의 무지개가 수놓아지는 것이다.

9.
    일련의 해석과정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분명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는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몸쪽 꽉찬 돌직구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노아의 아내 같이 다른 사람의 구원에는 나 몰라 하는 경향이 없지 않고, 어쩌면 함처럼 세상의 정욕과 욕심에 잠식된 채 가까스로 삶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 '일라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지 않느냐', '방주에 탄건 8명인데 왜 6명만 나오느냐', '감독이 크리스천이기는하냐' 따위의 질문은 일차원적이고 공허한 되물음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우리는 노아 같은 고뇌를 해본 적 있는가"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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