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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생각해봤어/2015 그냥 한 생각

20150114, 안녕하세요, 지역교회에서 찬양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제대로 찬양을 "인도"한다고 했을때 내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다. 내가 맡았던, "청년연합예배"라고 불리던 찬양시간에는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의 청년들이 참석했다. 고작 대학교 2년다닌 청년부 뉴비가 인도하기에 그들은 노련했고, 숙련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깊이있지 못했고, 모난 성격에 까칠한 태도로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던 차였다. 기껏 기타치면서 노래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내가 내세울 만한 것의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청년부의 리더십은 그런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해 내게 찬양인도를 시켰던 것 같다. (보통의 지역교회에서 찬양인도하는 사람을 깊이와 영적인 이유로 뽑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어. 노래하는 거 좋아한다 싶으면 시키는 게 대부분이지.) 하지만 나는 내가 그럴만한 가치 있다고 인정 받은 사람, 그만큼의 역할이 주어질 만큼 성숙한 사람이라고 착각했고,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예배인도자"라... 얼마나 폼나는 직함인가.




     나는 내가 '인도'를 한다는 생각에, 또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깊게 고민한다는 착각에 꽤 자주 다른 사람들을 감히 채근하고 설득했다. 그때 당시의 형, 누나들이 대부분 호인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은 내 설익은 사유와 빈약한 논리, 나조차도 알아듣기 힘든 부정확한 발음과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를 간신히 흉내낸 목소리를 참고 들어주었다. 그리 곧잘한다며 칭찬해주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그때 생각한 것만큼 대단한 일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고, 그마저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청년예배의 워십리더가 아니었다. 그냥 앞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누군가someone"였다. 그렇게 3,4년을 지내다가 입대를 했다.





      전역을 하고 필드를 바꾸어 오전예배찬양인도를 맡은지 햇수로 3년째, 만으로도 2년을 훌쩍 넘겼다. 이제는 우리 교회에서 볼 수 없는 전임 부교역자의 권유로 리더를 맡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회중의 추인이나 팀 단위의 동의 같은 것은 없었다. 내가 팀에 들어가자마자 거의 곧바로 리더가 된 말도 안되는 절차가 그 사실을 방증한다.

    지금 우리 팀에는 청년부에 딸을 둔 장년 집사님과 그 딸 뻘인 대학생이 같이 있을만큼 팀원간의 나이차가 상당하다. 삶의 영역도 다르고, 관심사나 고민하고 있는 것도 제각각이다. 그 가운데서 붙임성도 부족하고 성격도 모난 내가 리더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거의 없다. 내 믿음을 타인과 비교형량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내 믿음은 그들보다 결코 깊지 못하고 내 삶의 무게는 그들의 무게보다 형편없이 훨씬 가볍다. 나는 리더의 자격이 없다. 그냥 그들보다 음악을 조금 더 알고 있을 뿐. 그래서 누가 나를 리더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럽다. 쑥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럽다. 저는 리더라기 보다는 얼굴마담이에요, 그것도 못생긴 얼굴마담, 하며 손사래치며 도망치고 싶다.


     시선을 바깥으로 더 돌려보면, 노구를 힘겹게 이끌고 매주 아침마다 10분, 20분씩 일찍 나와 앉아 있는 권사님들이 보인다. 또 매일같이 삶의 치열한 전장에서 이 악물고 버티던 삶의 힘든 기색을 감추고 주일의 평안한 얼굴로 앉아 있는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보인다. 그들은 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며, 아버지이자 어머니들이다. 내가 앞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감히 뭐라 말할 수 있는 말은 몇마디 되지 않는다. 리더? 찬양인도자? 내 삶은 그들의 삶을 평가하거나, 삶의 방향을 제시할만큼 충분히 무게있지 못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개똥철학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최소한의 심정적 단서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일어나서 찬양하자, 박수를 치자, 손을 들고 찬양하자, 같은 부질없는 액션에 대한 요구도 사실은 그 순간이 활기차보이는 착시만 제공할 뿐,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그들의 삶이 박수치고 손 드는 것으로 해결된다면, 무례함을 무릅쓰고 얼마든지 시킬테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나는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몇 년 전처럼 교회 리더십은 내게 뭐 대단한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주일오전예배의 찬양시간은 청년예배의 그것(30분)보다 15분이나 적고, 물리적으로 15분 안에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 시간에 성경 구절을 몇 자 더 읽는다고, 앞에 있는 이제 겨우 솜털이 없어진, 그것도 삐딱하기로 유명한 네 말을 몇 마디 더 듣는다고 달라질 것 없으니 적당히 하고 들어가라고 얘기하는 것 같은 표정들, 그 지독한 의연함이 매주 눈 앞에 펼쳐진다. 사실은 너 하는 꼴 맘에 들지 않으니까 그만두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상처받을까봐 그 말을 꾹꾹 눌러담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을까 무릎이 벌벌 떨린다.


     그래, 어쩌면 내가 착각을 찐하게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노래를 통해서 예배시간에 적극성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이미 굳은살로 덮여버린 무릎을 벅벅 긁는 것만큼이나 무감각하고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부르자고 하고 있는 노래들이 삶의 묵직함과 동떨어진, 공허한 외침은 아닌가, 그냥 감정배설의 수단은 아닌가, 그마저도 서툴러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냥 일요일 오전에 예배당에 앉아서 조용하고 차분한 노래만 부르고 싶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내가 분탕질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타를 안고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주 오전에 부를 곡을 뽑을 때마다 늘 이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고 가라앉는 것을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