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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생각해봤어/2015 그냥 한 생각

20150222, 침례교는 사순절을 안 지킨다며?




1.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고 첫번째 맞는 주일이었다. 하지만 열시간 가까이 교회에 있는 동안 사순절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사순절의 의미를 담고 있는 순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전예배 찬양하면서 내가 얘기한 것이 전부.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침례교는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그런데 미국의 침례교회 중에서는 지키는 곳도 있는 것 같더라;;; 사실 우리 교회가 절기나 전례를 잘 지키는 편은 원래부터 아니었다. 하지만 침례교에 없는 장로도 만들어서 임명하는 판에, 더 중요하다면 중요한 절기를 지키는 것을 소홀히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자의적인 교회 운영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우리는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는 교회 전체의 동의 같은 것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사순절 내내 부르겠다고 <어찌하여야>를 연습하고 사순절사순절 얘기했던 게 뻘짓이 돼버렸음. 교단 교리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찬양인도한다고 설치고 있습니다요, 네네. (한심)



2.
     찬양시간에 감정적으로 고조되고 마음을 다해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어떻냐, 기도할때 더 폭발적으로 통성기도하는게 어떻겠냐는 피드백을 종종 받는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하겠는데, 단순히 종교적인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 자체가 실제 대단한 경지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면서도, 다들 원하고 있는데 혼자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고집부리고 있나 싶은 생각이 뒷통수가 간지럽다. 긁적.



3.
     어느 날 하나님이 갑자기 성수대교를 건너지 말라는 마음을 주셔서 그날따라 다른 다리를 이용했는데 알고보니 성수대교가 무너졌더라, 또는 LA에 살고 있었는데 믿음 생활 잘하니까 하나님이 LA를 떠나라고 말씀하셔서 떠났더니 폭동이 일어났다는 식의 이야기를 교회에서 듣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홍혜선과 그를 따랐던 50명의 출애굽 가족들이 그 살아있는 증거다.


     거대한 재앙 앞에서 하나님이 어느 특정한 개인에게만 피할 길을 허락하셨다는 무용담은 하나님의 활동영역을 개인의 안전과 영달을 보장해 주는 것 정도로 제한한다. 이런 제한적인 인식구조에서 그 무용담을 듣는 사람은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LA폭동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구조적이고 거시적인 영적 시력을 상실한다. 지독한 근시다. 이런 저시력으로 성경을 보면, 요나 얘기는 당연히 '하나님 말씀 지지리도 안 들은 개인'의 이야기가 되고,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가교 역할을 한 사무엘의 이야기는 '성전에서 밤새 기도하던 여인의 득남기'로 오독되는 것이다.



4.
     "예수 잘 믿는다"는 말의 "잘 믿는 것"이 뭔가 생각해봤다. 20년이 넘도록 교회에서 그 말을 들었는데, 사람들이 그 말을 하면서 제시하는 조건은 대부분 '새벽기도'나 '십일조' 같이 교회에 셀프종속되는 행위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 표현은 적응이 안된다. '바로 믿는다'라든가 '확실히 믿는다' 정도의 표현이면 수용할 수 있겠는데...



5.
     어느샌가 매주 주일 식순을 갖춘 형식의 예배보다 믿음의 고민을 타인과 나누면서 듣게 되는 치열한 생각들과 이야기들, 그 경험이 더 예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삶의 고단함과 치열함, 고통 혹은 하나님을 위해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살해당하기까지 하는 우리의 비참함에 비해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얼마나 짧은 순간이었나.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크기를 작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가 그러했듯 3년 빠싹 아프고 끝나버리는 것이 우리 할 바의 전부라면 해볼만 할텐데, 공생애 3년 동안 예수가 받은 고난에 비하면 우리 삶은 너무 길고 괴롭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의 모든 죄와 고통을 짊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어 구원의 기쁨이 사그라드는 기분이 든다."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부활에 대한 얘기는 이제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책임감 때문에 우리는 더 자극적인 고난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더 고된 신앙의 행위를 억지로 꾹꾹 해가면서 그 고난을 체감하려고 한다. 얼마나 아프셨나, 같은 생각을 쥐어짜내면서. 그러니까 예수의 고난의 정도를 따져보게 되고 우리 인생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하나님인 하나님이 인간이 된 것은 '사실 별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것'이다. 인간이 될 이유도 없고, 인간으로 고통받을 필요도, 치욕적인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 않아도 될 번잡스럽고 괴로운 일을 하게 된 동기가 있던 것이다. 인간을 향한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고난주간을 괴로운 고난의 시간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으로 보내는 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