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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까지는 못 되는 감상/그밖에

「WPO 3B sympony Series」

     언젠가 인터넷 동호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SNS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포털사이트 카페에 들어가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잘 알지도 못하는 음악 얘기를 좋다고 주고받았는데, 넷 상의 성격이라고 해봐야 한 꺼풀 벗기면 전혀 다른 단편적인 것이었지만, 그래도 성격도 잘 맞고 비슷한 음악취향을 가진 사람들과는 메일도 보내고 친분을 쌓아가는 식이었다. 그러다가도 ‘이 사람과는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 정도의 친밀함까지 느껴지면 실제로 만나게 되는데, 사실 상대방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은 적 없고, 어떻게 생겼는지, 걸음걸이는 어떤지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온라인에서 쌓은 그 사람에 대한 나만의 상상으로 약속장소에 나가보면 (어떤 의미로든)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했던 사람과는 (어떤 의미로든) 많이 다른 것이다. ‘아, 그동안 내가 알아왔던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



     음악회를 다녀온 감상도 어쩌면 온라인에서만 만나던 친구를 오프라인에서 만난 기분이었는지 모르겠다. 주변에 음대 다니는 친구들이 적지 않고, 개인적으로 기초적인 화성학은 공부해볼 정도로 음악에 대한 관심은 많았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에 대한 호감과 좋은 음악을 듣고 싶은 열의도 충분히 있는 편이었음에도, 실제로 본 공연이라고 해봐야 교회에서 하는 가을 음악회 같은 소규모의 음악회라든가, 노천극장 같은데서 하는 작은 음악회 (그것도 무료) 만 가본 게 전부고, 대부분 CD나 멜론, 유튜브에서 듣고 본 것이 대부분이었다.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단 한 번도 라이브로 본 적은 없는, 은둔형 애호가랄까. 이 공연은 온라인에서만 친하게 지내던 클래식을 처음 오프라인에서 제대로 만난 경험이었다. (어떤 의미로든) 의미 있는 공연이었던 것에는 틀림없다.



     <와인과 함께하는 클래식 음악>이라는 이름의 티켓을 구매할 때부터 예상은 했어도 진짜 웨딩홀인 것을 보고 당혹스러웠다. 국내에 클래식 공연장이 많이 부족하다는 소리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홀에서 소리가 잘 들리긴 할까 싶은 걱정도 들고. 하지만 혼자 갔기 때문인지 앞쪽 자리에 앉을 수 있어서 소리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9번 4악장의 튜닝하는 소리 같은 도입부를 좋아하는데, 실제로 하나둘씩 연주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악기를 점검하고 튜닝을 시작하자, 실제로 연주가 시작한 것 같은 긴장감과 기대가 동시에 느껴졌다. 굉장히 성실해 보이는 호른주자를 시작으로, 제2바이올린 주자 몇 명이 무대 위에서 악기를 만지자 하나둘씩 무대 위로 올라 소리가 덧대어지는 것을 보는 것도 꽤나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모두 무대에 올라 준비를 마치고 악장이 전체적으로 튜닝을 한 후에야, “짝짝짝짝”하는 셀프 박수와 함께 지휘자 선생님과 솔리스트가 무대 위로 올랐고, 지휘자 선생님이 발로 포디움을 슬쩍 미는 것으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WPO의 <3B Symphony Series> 프로그램 (2013년 6월 12일)

J. Brahms 브람스 (1833 – 1897)

Concerto for Violin in D Major Op. 77 바이올린 권혁주 

          • Ⅰ. Allegro non troppo

          • Ⅱ. Adagio

          • Ⅲ.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L. v. Beethoven 베토벤 (1770 – 1827)

Symphony No. 8 in F major Op. 93

          • Ⅰ. Allegro vivace e con brio

          • Ⅱ. Scherzando, Allegretto

          • Ⅲ. Tempo di Menuetto

          • Ⅳ.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3B의 웅장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오케스트라는 응당 선 굵은 음악을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인 것 같다. 모차르트의 해맑고 경쾌함보다는, 개인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베토벤의 고뇌에 찬 것 같고 힘 있는 음악, 치밀하게 계산된 바흐, 꼼꼼하게 설계되어 집 구석구석 집주인이 손보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은 브람스의 음악을 듣기 위해 이 공연을 고른 것이었는데, 결과만 놓고 본다면 황홀함 반, 아쉬움 반의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J. Brahms, Concerto for Violin in D Major Op. 77

     차분하게 현악기가 다져놓은 바닥에 관악기가 살포시 카펫을 까는 것 같은 도입부로 시작한 1악장은 갑작스러운 포르테로 옥타브를 왔다갔다 하면서 집중을 유도했다. 팀파니의 가세로 고조된 후에 부드럽게 이어지는 듯 같더니 갑작스럽게 거칠게 파도처럼 몰아붙이고 썰물처럼 빠지면서 등장하는 바이올린솔로는 도저히 귀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것이 곡의 힘인지, 이른바 연주자의 카리스마인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곡이 한창 진행되고 솔로잉이 잠시 쉬는 그 순간까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넋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바이올린은 피치가 너무 높아서 깽깽거린다고만 생각했었는데, 현악기들의 피치카토 위에 얹어지는 강렬하면서도 울부짖는 것 같은 솔로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관객이 중간 중간 호흡을 고르며 느슨해질 수 있을 부분에서는 솔리스트가 어김없이 힘있는 더블스톱핑 – 나중에 궁금해서 찾아본 단어 – 으로 긴장의 끈을 유지시켰다. 연주회 가는 동안 미리 멜론으로 들어볼 때는 22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연주를 듣다가 정신 차려보니 지휘자 선생님의 배턴이 그쳐있었다. 굉장한 22분이었다. 1악장이 끝나고 나서야 알았는데 주먹을 얼마나 세게 쥔 채로 봤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나 있더라.


     2악장은 관악으로 시작했는데, 다른 관악기 사이로 흘러나오는 오보에 소리가 주제부를 연주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바이올린이 주제부를 이어받아서 연주했다. 이때 솔리스트의 테크닉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몇 번 들어보았던 다른 앨범의 트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면서도 빠른 새끼손가락은 그의 연습이 얼마나 고되고 치열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음대 다니는 친구에게서, 꽤 유명한 연주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솔리스트의 더블스톱핑과 함께 시작하는 경쾌한 3악장은 2악장으로 차분해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게다가 미묘하게 박자를 뒤트는 것 같은 리듬은 줄 위에 서 있는 사람 옆에서 줄을 살짝살짝 흔드는 것 같은 기분을 자아냈다. “헝가리 집시 스타일의 색채감이 풍부하고 경쾌한 주제”라는 프로그램 상의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기분 좋게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후반부에 주제부의 리듬이 슬쩍 바뀐 부분이 인상깊었다. 모든 악장이 끝나고 솔리스트와 지휘자의 퇴장 이후에 앵콜을 요청하는 관객들의 박수는 두 번 세 번 나와서 인사를 하고는 “브람스의 곡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곡이라, 앵콜까지는 어려울 것 같다”라는 지휘자 선생님의 양해를 부탁하는 말을 듣는 것으로 간신히 그쳤다.




L. v. Beethoven, Symphony No. 8 in F major Op. 93

     이번 관람이 황홀함 반, 아쉬움 반이라고 느낀 데에는 흠잡을 데 없었던 연주자들의 연주와 지휘자 선생님의 친절한 해설과 설명, 지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선 굵고 묵직한 베토벤의 음악을 기대했던 내게 8번 교향곡의 재기발랄함과 유머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전에 사전에 잘 알지도 못하고 섣부른 기대했던 스스로에게 비난을!)


     네 악장을 다 합쳐도 30여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8번 교향곡은 지휘자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으로 시작됐다. 각 악장별 주제와 주요 악기들을 한 번씩 들려주는 배려는 카리스마 넘치는 솔리스트가 없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2부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2악장의 목관악기의 메트로놈 흉내라든가,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이 주고받는 주제는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었고, 베차르트 (!) 같은 음악에 아쉬움을 느낀 나를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다음 달에 교향곡 3번을 할 예정이라고 하던데 보고 싶어졌다.)



W. a. Mozart, Symphony No. 40 in G minor K. 550 mov. 1

     베토벤 교향곡 8번 이후에 앵콜이 이어졌는데, 바흐-베토벤-브람스를 주로 연주하던 기존의 레퍼토리에서 조금 더 확장해서 모차르트를 연주할 예정이라는 설명과 함께 제일 잘 알려진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으로 공연은 끝이 났다.



     오늘 처음 만난 “친한 온라인 친구”는 처음의 생경한 첫인상과 어색한 첫 대면에도 그동안 꾸준히 쌓아왔던 친밀과 애정으로 금세 친한 담소를 나누는 친근한 친구가 되었다. 데면데면한 나를 친절하게 가장 좋은 곳으로 안내해주고는,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신나서 같이 떠들어대는 친구처럼 두 시간이 너무 아쉽도록 보내버리게 만든 그런 친구였다. 2호선 지옥철에 끼어 집으로 들어오는 내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브람스와 베토벤의 다른 곡들이 재생되고 있었고, ‘이 곡도 언젠가는 라이브로 들을 수 있겠지’하는 설렘과 재회에 대한 기대감도 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